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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4 15:25영화가 재밌으면 됐지, 뭐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Howl's Moving Castle
-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 출연
- 바이쇼 치에코, 기무라 타쿠야, 미와 아키히로, 가슈인 타츠야, 카미키 류노스케
- 정보
- 로맨스/멜로, 판타지, 애니메이션 | 일본 | 119 분 | 2004-12-24
사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D의 추천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정성일이 쓴 평론을 읽은 다음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믿고 보는 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음악도 좋고, 그림체도 좋고, 배경도, 내용도 좋지만 뭐니뭐니해도 상상력! 야, 어떻게 요런 생각을 했을까, 하, 그걸 또 요렇게 표현하네, 뭐 그런 거에 감탄하면서 두 시간을 쓰는 거다. 별로 아깝지가 않다. 그래서 어제 본 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
시작하자마자 뿅 가더만. BGM이 은은하게 깔리면서 이건 중세도 아니고 현대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도 아닌 이상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첨단의 과학기술과 사라진 문명수단들이 용액처럼 한 데 녹아있는 이상한 세계, 괴상한 인물들을 펼쳐놓았다. 대단하다 대단해. 더 대단한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스크린을 통해 접하는 관객들이 5분 만에,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놀랍게도 하야오의 세계에 적응한다는 사실! 요정도면
영화 내용은 착하디 착한 이야기. 다 보고 나니 생각나는 게―<매트릭스 1>?
네오(앤더슨)와 트리니티/하울과 소피의 관계 사이의 유사성. 잠수함/성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레지스땅스적 역할. 앤더슨이 트리니티의 사랑을 통해 네오로 탄생, 재생하는 것처럼 하울도, 소피도 상대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저주를 극복하고 젊음/생명을 얻는 일 등. 뭐 끼워 맞추기지만 비슷하더라고.
물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매트릭스 1>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그래도 유사성은 또 존재하는데, 요건 조금 나간 이야기지만, 둘 다 지극히 반동적이라는 사실. 현실과 가상, 실제와 본질을 전환시켜 현실감각을 무너뜨리는 <매트릭스 1>가 얼핏 보기에는 親혁명적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영화는 지독한 ‘영웅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앤더슨은 왜 네오일까. 그냥, 네오니까. 세상을 바꾸는 건 누구일까. 네오. 왜? 네오니까. <매트릭스 1>에 따르면 결국 매트릭스를 무너뜨리는 건 네오다. 그가 영웅이 되는 이유는 전체 대중들의 선택의 결과도, 자신의 절절한 노력의 대가도 아니나. 그냥 그가 영웅이 될 운명인거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영웅’이고, 그것도 이미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돼 있으며, 나머지는 이 영웅을 보좌할 역할에 있다는 주장. 요건 영웅주의다. 반동적이다. 다음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현실을 동화로 만들어 버린다. 하야오의 영화만 보면 행복해진다. 살아있기를 잘한 거 같다. 착하게 살아야 될 것 같다. 근데 그게 좋은 게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성일이 <오아시스>를 보고 쓴 평론이 잘 설명해준다. 길게 인용하면,
영화 <오아시스>가 만들어놓은 그 자리에서 나와, <오아시스>가 끝나고 난 다음 한공주와 홍종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별 네개를 달고 나와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내와, 결코 여동생을 내주면 안 되는 가난한 오빠 가족을 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약간 눈물을 흘리고 감동받아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영화관을 나설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실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당신은 감동받은 것이 아니라 안심한 것이다. 저 황량한 세상 속을 환상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진심을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해심과 자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교착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환상을 부추기기 때문에 역겨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환상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와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하고, 그래서 감동을 받았다고? 어떻게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할 수 있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자리만이 숭고하고, 자비로우며, 안전한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다. 하긴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일을 잊고 영화관에 온다는 것은 그만큼 비겁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영화 속의 주인공이 괴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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