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책 2011/11/19 21:26『해변의 카프카』, 무라카미 하루키
* * *
예전에는 전공투를 매개로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려 했다. 하룻밤 꿈같이 사라져 버린 젊음과 처절한 실패. 그 상실의 아픔. 물론 지금도 그런 해석이 오독은 아니라 생각하지만 언제부터인지―아마 『1Q84』를 읽은 후 다시 하루키의 책들을 찾아보게 된 후로 그의 소설에서 정작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 하루키가 만들어낸 인물들이 너무 매력적으로 보이지 시작했다.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말이다.
내 작품 속의 일반적인 주인공들은 그들 나름의 독자적인 살아가는 방식과 독자적인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내가 주로 그려온 것은 그 같은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며, 그 같은 사람들의 가치관인 동시에 그들이 살며 통과해 가고 있는 삶의 궤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주인공들의 눈에 비친 세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라고도 하겠습니다.
특히 내 마음을 사로잡은 인물은 『1Q84』의 주인공 덴고다. 덴고의 주업은 학원 강사다.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친다. 학원에서 강의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와 맥주와 함께 직접 식사를 만들어 먹는다. 결혼은 하지 않았고, 유부녀 걸 프렌드와 일주일에 한번씩 섹스를 한다. 수학을 좋아하고 수학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한편 자신이 이 세계에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 하지만 창작에 소질이 없어 등단하지 못하는 아무추어 작가다. 규칙적이고 진중한 성격이다. 막상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별 매력이 없는 인물인 것 같은데 처음 『1Q84』를 읽었을 때엔 이 덴고라는 인물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한동안 잘 먹지도 못하는 맥주를 마트에서 사 와서 퇴근 후 홀짝거리며 책을 읽기도 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원하고 닮고 싶었던 것은 하루하루 그냥 닥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소설 속 인물들처럼 ‘스타일’이 명확한, 정리되고 안정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대학 때는 물론이거니와 얼마 전에야 끝난 2년 10개월의 병특기간에도 규칙적인 생활과 패턴은 있었지만 그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했다. 정주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 제끼듯 살아왔고 해치우듯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일정 수준의 소득이 필요하고 안정된 직장과 보금자리가 필수다. <파이트클럽>의 초반부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읊조리는 그런 조건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게 없었다. 나이 서른에야 이제 그런 게 생기고 있는 상황이다. 회사에 취직해서 수습기간도 이제 거의 끝나가고 슬슬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하는 습관도 생기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한번 웹쇼핑, 일간지 구독, 아침엔 과일, 늦은 저녁 영양보충 등 규칙적인 생활을 위한 패턴도 마련하는 중이다. 남들은 내 나이에 일상에서의 일탈을 꿈꾼다는데 나는 이제야 정착과 생활을 꿈꾸니 확실히 남들보다 느리긴 하다. 어쨌든 나는 이제부터 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야 한다.
* * *
해변의 카프카에도 멋진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하루키는 부정하지만) 주인공 다무라 카프카 군은 세상에서 가장 터프한 소년이 되기 위해 꼼꼼하게 웨이트트레이닝으로 몸을 단련하고, MD에 프린스와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줄기차게 들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한 독서를 즐기는 15살 소년이다. “제가 추구하는 것은, 제가 추구하는 강함은, 이기거나 지거나 하는 강함이 아닙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치기 위한 벽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가해지는 힘을 받아 거기에 견뎌내기 위한 강함입니다. 불공평함이나 불운, 슬픔이나 오해, 몰이해―그런 것에 조용히 견뎌나가기 위한 강함입니다.”라고 스스로를 밝히는 카프카 군은 분명 매력적이다. 그 외에도 이상한 남장여자 오지마 상과 사에키 상도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하지만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며 나는 그보다 인상 깊은 대목을 발견하는데,
바로 상상력과 책임에 관한 부분이다. 나치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행위의 올바름에 대한 의문 없이, 다시 말해 상상력 없이 자기에게 부여된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기 위해 단기간에 얼마나 적은 비용을 들여서 유태인을 처리할 수 있느냐 에만 몰두했기에 전범재판에 불려 나와서도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하는 그를 두고 소설 속 오지마 상은 다음의 메모를 남긴다.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y.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아이히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상권 p.256
상상하는 것에서 이미 책임은 시작된다. 이 명제는 옳은 명제일까.
15살 소년이 아버지로부터 저주와 같은 예언을 듣는다. 너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누나를 범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꿈속에서 누나(일지도 모르는 여자)를 범하고 환상에서 어머니(역시 가설로서만 확신할 수 있는 여자)와 관계를 맺으며 바람으로 아버지를 죽인다. 현실에서 주인공 소년은 누나를 범하지도 아버지를 죽이지도 않는다. ‘진짜’ 어머니를 범했는지는 글쎄, 잘 모겠다. 어쨌든 확실히 ‘죄’라고 불릴 수 있는 행위를 현실의 소년은 아무 것도 저지르지 않는다. 하지만 소년은 인정하고 수긍하고 만다.
너는 이제 여러 가지 것에 멋대로 휘둘리고 싶지 않다. 혼란스러워 지고 싶지도 않다. 너는 이미 아버지라는 존재를 죽이고 어머니라는 존재를 범했다. 그리고 이렇게 누나라는 존재 속에 들어가 있다. 만일 그것이 어떤 저주라면, 그것을 자진해서 받아들이려고 생각한다. 거기에 있는 일련의 프로그램을 빨리 끝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 한시라도 빨리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그 뒤로는 누군가의 의도 속에 말려 들어간 누군가로서가 아니라, 완전히 너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네가 원하는 것이다.
―하권 p.271
상상하는 것에서 책임은 이미 시작하기에 실제 행위가 현실에서 펼쳐졌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이드가 그랬는지 몰라도 꿈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의 표출이라지 않는가. 어쨌든 소년은 의지로, 꿈으로, 상상으로 금지를 어기고 예언을 실현시켰다. 현실의 법정에서 소년은 무죄로 방면되겠지만 이는 소년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는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15살 소년에서 어른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다른 이야기로, 소설에는 메타포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등장한다. 세상은 메타포야 등등. 카프카 군이 아버지로부터 들은 익숙한 오이디푸스 예언 역시 메타포로 이해해야 한다. 추리하자면,
예언자 아버지는 자신을 만들고, 부양하며,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결정지은 존재다. 자기 몸의 유전자이자 거울 속에서 상시 만나는 소름끼치는 모습이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들을 공급하는 존재가 바로 아버지다. 이런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은 소년이 어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반드시 현재의 자신을 결정지은 존재를 자기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을 제거하고 껍질을 깨야 어른이 될 수 있다. 다음으로 어머니와 누나를 범하는 행위는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기준, 사회적으로 금기시하는 최소한의 윤리이다. 하기에 이상의 행위를 실현하는 것은 사회적 일탈을 넘어 아예 사회에서 축출되는 범죄 중의 상범죄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년 카프카 군은 이런 일탈행위를 ‘상상’으로 실현하고 나서야 세계의 일부가 된다. 다시 적자면, 그리고 눈을 떴을 때, 너는 새로운 세계의 일부가 되어 있다. 이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세상은, 소년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세상은 사실 정글의 논리, 인간의 논리를 버리고 동물적 감각으로 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여서가 아닐까. 그래서 까마귀 소년은 다무라 군에게 터프해질 것을 계속해서 주문하는 게 아닐까. 하루키는 이 소설의 제목의 의미를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을 방황하고 있는 외톨이인 영혼. 아마 그것은 카프카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하고 밝히고 있다. 부조리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 15살 소년이 마주하는 세계는 이와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하루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참으로 근사하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아늑한 삶의 터전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뭐가 아늑한 삶의 터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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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에 빠지는 듯한 곤란함에 어리둥절해진다. 결말까지 읽고 난 후엔, 뭐랄까,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를 다 읽고 난 후의 느낌이라고나 할까. 하여튼 어렵고 복잡하다. 근데, 뭐 그게 중요한가. 하루키 소설엔 결말보다 중요한 게 있다. 다 이해하지 못해도 빠져드는 힘이 있다. 그걸 느끼면 족하다.
(2011년 9월 18일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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