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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2/01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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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29 00:11불쌍타, 찰스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 문단으로 요약
: 빅토리아 시대 영국, 귀족 출신의 찰스는 오랜 유랑생활을 마치고 부유한 상인의 딸 어니스티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의 삶에 사라 우드러프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별명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 보다 천박한 말로 '프랑스 중위가 먹고 버린 년'이다. 사라는 마치 실성한 듯한 모습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그녀에게 찰스는 호기심으로, 동정심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몇 가지 사건이 있은 후 찰스는 사라가 지금까지 그가 만나왔던 어떤 여성보다도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고, 동시에 자신이 삼촌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변화, 실업계에 진출하라는 예비 장인의 강요 등이 이어지면서 점점 심한 갈등에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찰스는 사라와의 사랑을 위해, 보다 정확히는 그의 미래를 위해, 어니스티나와 파혼을 하고 사라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랑의 삶을 2년 동안 보내고 난 찰스는 마침내 사라를 만나게 되는데, 이제 그에게 두 가지 미래가 그려진다.
이 소설의 특징을 몇 문장으로 요약(책 소개에 적힌 대로)
: 빅토리아 시대 소설과 포스트모던 소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지평의 소설이다.
옷깃의 주름에서부터 어투의 어색함에 이르기까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세심하고 완벽하게 재현해 낸 작품이다.
시대의 위선과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두 총명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자유에 대한 정열이 고갈되어 버린 20세기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이다.
이 소설을 읽은 직후 내 심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
: 불쌍타, 찰스.
**
일단 재밌다. 그 재미라는 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나름대로 표현해보자면 “오―, 재밌는데?” 하는 재미라기보다 “어랍쇼, 이거 재밌는데?”하는 재미다. 음―.그리 잘 표현한 것 같지 않네. 일단 읽는 내내 위에 소설의 특징으로 적은 것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사실 내가 빅토리아 시대를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냐만, 이런 경우 내가 의지하는 건 홉스바움 선상님, 『자본의 시대』에서 읽은 빅토리아 시대는 이러했다. ‘부르주아 세계의 확실성과 자신감’이 전면에 등장하고, 다윈주의와 실증주의 과학의 힘으로 ‘반박의 여지없는 공정한 눈으로 그들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하는, 즉 ‘진보의 드라마’였다.
진보의 드라마는 거대하고, 계몽적이고, 자신에 차 있고 스스로 만족하며, 무엇보다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하지만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믿음은 얼마 안가 산산조각 나고 만다. 곧 이어 등장할 시대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리’로 대표되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전 유럽을 폐허로 만들 세계대전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다시 소설로.
소설 곳곳에서 발견하는, 아니 거의 작가가 알려주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들. 가령 “헤겔의 철학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는 변증법적 정신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반대편에 서서 생각지 않았다. 역설은 그들에게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실존주의적 계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사슬을 추구하는 사람들, 신중한 연구와 면밀한 적용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이론을 세우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라거나 “트랜터 부인은 젊은 시절의 솔직한 문화에 아직도 즐겁게 빠져 들었고, 찰스는 그 옛날의 솔직한 문화에 향수를 느꼈다. 작달막한 의사의 장난기 어린 눈과 즐거워하는 트랜터 이모의 모습을 보면서, 찰스는 자기 시대의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숨 막히는 점잔 빼기, 수송과 제조에 쓰이는 기계들에 대한 숭배, 그보다도 훨씬 무서운 기계들―이제 막 사회 관습 속에 만들어지고 있는 기계들―에 대한 숭배가 그를 구역질나게 했다.” 등등. 사실 이런 걸 읽고 있으면 “아, 빅토리아 시대는 이랬구나” 하는 생각보다 “아, 홉스봄 책에서 본 것 같아. 다시 ‘시대’ 시리즈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긴 했지만 어쨌든 소설을 통해 그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고, 씹어볼 수 있는 독서의 경험은 그 자체로 재미가 굉장히 쏠쏠한 맛이시.
***
더 재밌는 건 존 파울즈란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게 소설의 배경과 100년 정도 차이가 나는 1960년대라는 것이시. 사실 이런 유의 소설들, 오래전 과거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의 경우 작가가 최대한 티를 안 내는 게 정상처럼 보인다. 소설 속 시대와 소설을 쓰고 있는 시대의 차이를 말이다. 예로, 김훈의 『남한산성』. 이 소설은 3인칭이고 전지적시점이지만 작가가 마치 병자호란 시대의 기자처럼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이 역시도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 소설이 도대체 언제 작성된 것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김영하의 『검은 꽃』도 그렇고,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도 그렇고, 하여튼 거의 모든 소설이 이런 방식을 따른다. 그런데 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소설은 일부러 작가가 여기 저기 참견하면서 과거와 현대의 이중초점을 가진다. 빅토리아 시대와 오늘(1960년대)의 이상한 비교. 35장은 아예 통째로 여기에 할애되어 있다. 일단 이게 재밌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존 파울즈는 소설 곳곳에다 여러 장난질을 하는데, 그 중 하나. 본문에서 노골적으로 소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파한다. 이를테면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주인공들의 마음과 깊은 생각까지 아는 척해왔다면, 그것은 내가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된 관행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라거나 “어쩌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는 줄만 제대로 잡아당기면 된다고. 그러면 꼭두각시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소설가는 요구에 따라 꼭두각시들의 동기와 의도를 철저히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러나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게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들은 가끔 아내들을 살해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고도 무사히 넘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는 식. 심지어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독자 앞에 나타나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게 별로 안 어색하다. 소설의 흐름도 크게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이걸 해설에서는 ‘포스트모던’ 글쓰기라는데, 포스트모던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포스트’하면서 ‘모던’한 느낌이었다. 말이 안 되나?
***
그리고 이제는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나의 간단한 대답이 그렇게 많은 것을 결정지어 준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놀랍게 여겨졌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되어 버렸다.
이제 to the core. 이 소설을 읽게 된 가장 큰(사실은 유일했던) 동기였던 것은 김영하의 추천. 영하 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이 소설의 제목인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라 우드러프. 이 인물이 곧 이 소설인 셈이다. 그녀는 19세기라는 시대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 도덕률과 곧 다가올 20세기의 해체적 양상을 동시에 내장하고 있는 인물이며, 따라서 그녀를 통해 소멸해가는 19세기적 도덕률과 다가올 20세기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김영하, 『포스트 잇』
물론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책을 덮은 순간 떠오른 것은 찰스, 불쌍한 찰스였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입체적인 인물은 찰스다. 사라는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갈 길을 간다. 아니 애초에 완성형 인간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 사라는 찰스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지 모른다(사실 모든 인물이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금징수원처럼, 불길한 전보처럼 그녀는 찰스에게 찾아온다. 그 덕에 이름만 들어도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이 찰스란 놈은 소설 내내 번민과 갈등의 부침을 겪는다. 절벽 위에서 바다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건 사실 사라가 아니라 찰스다. 그는 사라와의 연애사건을 거치면서 진보에의 확신을 잃고, 자기 신분에 대한 애착도 버리고, 안락한 부르주아 가정에 대한 환상도 부수고 다시 또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에 운명의 주사위가 패배의 쪽으로 던져지듯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지위도, 재산도, 약혼도, 미래도. 그 결과 그는 무엇을 얻었는가. 사라? 글쎄, 소설의 결말을 두 개로 열려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함정처럼 보인다. 존 파울즈가 소설에 직접 등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런 경우 두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더 인상적인 법이다. 그는 사라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보는 게 합당한 것 같다). 그럼 사라가 아니라면 무엇을? 설마,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 현대적 인간으로 탄생되었다는 이야기? 그래, 그 고민과 번뇌, 몸을 절단하는 것 같은 선택으로 새 유형의 인간이 되었다 치자.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이런 것뿐이지 않은가.
한순간, 그 조용한 밤에, 이성과 과학이 녹아 버렸다. 인생은 난해한 기계, 불길한 점성술, 태어났을 때 내려져 항소조차 할 수 없는 판결,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無)였다.
이거 너무 불쌍하지 않나?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미래형 인간이 준 선물은 이렇게 뼈아픈 진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김영하의 말과는 달리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사람’은 사라가 아니라 찰스이지 않나. 왜 이렇게 찰스의 불행에 잡착하냐면,
나도 그런 것 같으니까. 나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를 느끼고 벼랑 위의 포뇨,가 아니라 찰스가 되어버린 심정. 요게 이 소설을 덮자마자 “불쌍타, 찰스”하는 탄식이 터졌던 이유되시겠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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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28 21:53과연, 감히, 희망할 수, 있겠는가
율리시즈의 시선
The Gaze of Odysseus
- 감독
-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 출연
- 하비 키이텔, 얼랜드 조셉슨, 마이아 모겐스턴, 타나시스 벤고스, 반겔리스 카잔
- 정보
- 전쟁, 드라마 |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알바니아, 루마니아 | 176 분 | -
*
먼저 『오디세이아』부터;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중심테마는 ‘영웅의 귀환’. 그리고 평화의 회복. 하지만 정작 인상적인 건 오디세이의 여성편력. 애초에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가하게 된 원인은 절세미녀 헬레나. 풍랑 속에서 자신을 ‘거둬 준 죄’로 더 큰 상처를 얻는 칼립소, 세이렌 등 ‘마녀들’. 그리고 20년 동안 수절하고 있는 남자들의 이상 페넬로페. 하여 이것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처럼 수컷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담은 작품. 그러나 여전히 소설, 영화에서 각종 모티브로 활용되는 훌륭한 도구.
**
이제 <율리시즈의 시선>;
오랜 미국 망명을 마치고 고향 그리스로 돌아온 주인공(하비 케이틀). 그의 목적은 행방이 묘연한 그리스 최초의 영화(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지역의 역사와 관습을 담았다고만 전해지는 마나키아 형제의 미현상 필름)을 찾는 것. 그리스에서, 알바니아로,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로 수소문해서 필름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 과거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그는 계속해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꿈으로, 환상 속으로 가라앉고, 그런 그를 더욱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잔인한 내전의 풍경. 결국 가장 격렬한 내전의 현장에서 찾게 된 마나키아 형제의 필름. 하지만, 하지만…….
***
소비에트의 몰락과 연이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의 결과는 처참했다. 특히나 여러 민족들이 섞여 만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세르비아계에 의한 복수라는 이름의 학살이 뒤따랐다. 이 비극적 현실은 너무나 엄중하였기에 거의 실시간으로 문학으로, 영화로 다루어졌다. 95년에 나온 <율리시즈의 시선>도 그런 영화다. 발칸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영화의 절대적 요소로 된다. 확실히 이 영화는 처절한 울림을 담고 있다. 마지막 ‘안개 속의 학살’ 시퀀스에 이르러선 그 누구도 마음 편히 영화를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쿠스트리차의 <언더 그라운드>가, 그 정치적 위험성은 차치하고서, 어쨌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지금보다 나은 희망의 미래를 보여주려 한다면, 이 <율리시즈의 시선>은 영화 곳곳의 환상 속에서마저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든다. 돌아온 율리시즈의 시선이 닫는 곳; 넓은 눈밭에 나무처럼 꽂힌 듯 서 있는 사람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어찌 하나같이 울음을 머금고 있는 절망적인 표정들. 테오 감독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폭격으로 인해 붕괴 일보 직전인 캄캄한 극장 안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과연, 감히, 희망할 수, 있겠는가,
****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 <율리시즈의 시선>에서 가장 빠른 흐름.
파괴된 동상. 현실 사회주의의 창시자. 이제는 타국으로 흘러가는 그에게 민초들이 보내는,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마지막 인사. 체제의 몰락이 부른 비극. 이질적 집단을 통일시켰던 이념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를 메꾼 것은 무엇이었나. 진보라는 개념을 부정하게 만드는 내전이 끝난 후 그 자리를 차지한 건 피 묻은 돈의 향연. 백지상태였기에 가장 철저하게 전파된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인신매매, 밀수, 마약, 갱 조직 등 깡패 자본주의. 어쩌면 내전은 한 시대의 대단원이 아니라 새 시대의 전초전이 아니었을까. 97년, IMF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
영화는 지겹고 또 지겨울 정도로 느리다. 앙겔로풀로스 작품임을 감안하고 마음의 다짐을 하고봐도 느리다. 곳곳에 현실과 환상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특유의 선문답 같은 물음들이 넘쳐나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오디세이아』에서처럼 네 명의 여자들이, 그것도 1인 4역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솔직히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피로감이 장난 아니다. 그래도 확실히 잘 만든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건 영화 초반 이 한 장면만 봐도 검증된다. 참고로 이게 한 쇼트다.
******
앙겔로풀로스를 보고 나니 쿠스트리차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시간은 없는데 볼 게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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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2/02/21 19:49하지만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그는 영화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리스에는 영화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였다. 그가 입학한 학교는 프랑스 고등영화연구소IDHEC(지금의 페미스FEMIS)였다. 이 학교는 입학 자격 요건도 까다롭지만 교과 과정도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학교를 다닌 많은 감독들이 퇴학을 당하거나 중퇴한 사실은 유명한 일화이다. 앙겔로풀로스는 ‘고전 영화 스타일’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이 수업은 고전 영화의 문법에 관한 과정으로 투 쇼트나 상상선, 쇼트―상대 쇼트 나누기로 콘티를 구성하는 시간이었다. 시나리오를 나눠주고 과제로 그다음 주까지 콘티를 작성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앙겔로풀로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방식으로 주어진 시나리오의 등장인물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민 끝에 고전 영화에는 존 포드만이 아니라 오선 웰스의 방법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래서 주인공을 가운데 세워 놓고 카메라가 360도 회전 트래킹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하는 콘티를 구성했다. 그 콘티를 보고 지도 교수는 앙겔로풀로스를 불렀다. “자네는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나?” 앙겔로풀로스는 대답했다. “꼭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자 교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네의 천재성은 그리스에나 가서 뽐내 보이게.” 이 말은 학교를 떠나라는 뜻이었다. 앙겔로풀로스는 대답했다. “그리스에서도 그러고 싶지만 파리에서도 그걸 인정받고 싶습니다.” 사실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여기에 이르면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선생은 간단하게 말했다. “만일 학교에서 요구하는 대로 다시 콘티를 짜지 않으면 자네는 학교 바깥에서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영화를 하게나.” 앙겔로풀로스는 집에 돌아와서 밤새 고민했다고 한다. 새벽이 올 때쯤 자신에게 질문했다. “나는 영화를 원한다. 하지만 영화는 나를 원하는가?” 그리고 자신에게 대답했다. 자신이 영화를 새롭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영화가 새로운 영화를 위한 하나의 점을 찍을 수 있다고 그 자신에게 다짐을 했다. 그는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서 자퇴 원서를 내고 그리스로 돌아갔다.
―정성일, 정우열, 2010,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바다출판사, pp.419-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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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21 13:26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정성일의 평론집을 읽고 난 후 부끄러운 고백. 나는 아직도 영화를 소설 읽듯이 보는 거 같다. 스토리라인을 중심으로 해서 줄거리에 집착하고, 영화의 표현방식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시대적 배경과 감독의 주장, 이야기 구조와 비유, 상징, 설정 등을 통해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건 소설을 읽을 때랑 큰 차이가 없다. 좋은 영화와 좋은 소설의 차이는 내게 있어 불분명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카메라로 소설을 쓰는’ 이창동의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이게 꼭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바람직한 영화보기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문학이 아니다,라는 정성일의 이야기. 물론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낀 건 얼마 전 <스틸 라이프> 감상. 이건 정말 다른 문학의 표현으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을 영화라는 양식으로 토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대충이나마 주워들은 롱테이크와 트래킹, 팬 등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찾아왔다. 어떻게 이걸 한 번에 다 찍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 몇몇 씬들. 그리고 그 씬들이 남긴 여운. 영상처럼 축축이 젖어드는 심정. 분명 문자라는 형식이 결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담겨있었다. 이게 바로 영화구나. 좀 더 나가자면, ‘영화는 문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영화인의 희망이 느껴지는 심정이었다(물론 나는 영화인도 아니지만). 그리고 난 후 다시 한 번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 마음먹고 영화보기 수련을 해야겠다고 생각, K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대학원에 진학한 K군이 바쁘다고 ‘다음 기회에’라 하시네.
돌아보면 내가 ‘최고’라고 했던 영화들은 확실히 영화의 장점(혹은 종특)을 제대로 살린 영화들이었다. 가령 <봄날은 간다>. 은수와 상우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빠져드는 대목. 영화는 한 마디 대사도 없이 겨울 산사에 눈 내리는 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로 그들의 감정을 보는 이에게 전달한다. 요걸 과연 문자라는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슷하게 <대부 1>의 마지막 장면. 감정의 대립. 문 하나를 두고 나뉘는 세계. 이제는 다른 세계에 속한 마이클. 그를 외부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케이의 시선. 그 시선이 나의 것이 되고 조용히 닫히는 문. 문과 함께 닫히는 영화. 암전. 그리고 내 머릿속도 암전. 찾아오는 떨림. 전율. 요런 건 아무리 잘 쓴 것이라 해도 글로 읽었다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하나 더 <안개 속의 풍경>. 무슨 마조히스트가 된 심정으로 소녀와 소년의 불행, 불운을 지켜보다가, 그야말로 느릿느릿하게 지켜보다가, 마지막 순간, 그 두 남매와 함께 지친 몸과 마음으로 국경을 넘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바로 그 때 안개가 걷히며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 그 때 터지는 듯 찾아오는 압도적 울림을 과연 영화가 아니라면 어느 예술에서 똑같이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러니 내가 이 영화들을 좋아할 수밖에.
한편, 이창동. 내가 무지무지 좋아하는(반대로 정성일은 싫어하는 게 분명한) 이창동 영화들을 두고 생각해보면, 이건 영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니 영화가 아니라면 더 훌륭하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밀양>. 마찬가지로 <시>. 비슷하게 <초록물고기>. 이 영화들에서 과연 이 것이 영상을 수단으로 했기에 가능한 성과는 무엇이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몇 장면 떠오르지 않는다. <시>에서 손자와의 베드민턴씬, <초록물고기>의 자동차유리씬 정도? (생각해보니 <초록물고기>는 빼야겠다. 요건 아니다.) <오아시스>는 위의 것들이랑은 다르다. 다만, 정성일의 말대로 다른 위험성을 가진 영화라 열외. <박하사탕>은, 요건 그냥 내가 별로여서 제외. 하여튼 이창동의 영화는 영화다운 맛은 확실히 없다. 그렇다고 별로냐면, 그건 아니다. 이건 영화라는 형식에 맞고 안 맞고의 범주에서 벗어나 생각해볼 문제다. 이창동의 ‘작품’은 어떠한 소설이나 영화들보다 삶의 근저에서 사람을 울리는 맛이 있다. 확실히 그렇다.
마무리하며. 정성일의 평론집을 다시 펼친 이유는 왕가위와 <스틸 라이프> 때문이었는데, 보다 보니 다른 이야기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은 언제 봐도 사람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글이다. 문학/영화계에 대한 비판은 영화란 무엇이고 문학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한다. (여기서 정성일은 음악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겠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음악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반면에 소설 대신 영화, 마찬가지로 소설 대신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정말 영화에 미친 사람이 미치도록 영화를 파고드는 이야기에 경외감이 든다. 대단하다. 글 어렵게 쓴다고 짜증냈었고, 너무 유식한 척 해서 무식한 나로서는 밥맛이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그런 티내기 마저 존경스러워 보인다.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주시라. 끝으로, 정성일 평론을 보고나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봐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든다. 이번 참에 봐야겠다. 카메라를 생각하면서, 선택을 생각하면서, 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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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20 13:24내가 지금 굉장한 걸 보고 있다!
①책을 다 읽고 덮을 때 혹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경우. 예로는 『태백산맥』(“대장님, 우리는 아직 심이 남아 있구만요.”), <안개 속의 풍경>(나무, 그 나무) 등등.
②처음 봤을 때는 별로네 싶다가 2~3년 지난 다음에 다시 읽었을 때 “아, 왜 내가 이걸 제대로 몰랐지?” 하는 경우. 10년 만에 다시 읽고서 한동안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멍해 있었던 『상실의 시대』나 <대부> 같은 걸작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③보면서 ‘내가 지금 굉장한 걸 보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드는 경우. 이 경우엔 감상과 동시에 전율이 찾아오는데 내 경우 계간지 창비에 실린 『꽃 같은 시절』 part 1을 읽었을 때나, 캄캄한 비디오방에서 <올드보이>의 오프닝을 봤을 때, 뭐 이정도가 있겠다.
영화에 대한 해설은 정성일과 지아장커의 대담(『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 수록)에 거의 다 담겨 있다. 아래 인용은 모두 거기에서 Ctrl+C, Ctrl+V한 지아장커의 말.
그러니까 <삼협호인>의 영어 제목인 ‘Still Life’는 중국어로 ‘靜物人生’입니다(‘고요한 삶’이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담배, 술, 차, 사탕은 가장 중요한 네 가지입니다. 그 네 가지만 있으면 가정 생활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네 가지 물질을 통해서 삶의 순간을 멈춰 세운 다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행복하십니까?
*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물들이 아니라 배경으로 나온 산샤라는 생각. 한쪽에서는 산수화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그 밑으론 끊임없이 철거, 공사가 진행되고 건물이 들어서는 공간. 딱 봐도 현대 중국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산샤라는 공간을 지아장커라는 감독은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다뤘다. 인물들이 프레임에서 사라져도 여전히 남는 이 풍경의 영상은 적막하지만 어떤 소리 높은 발언보다 정치적으로 느껴진다. 인물을 압도하는 공간! 그런데,
보다 보니 그게 아니다. 점점 그 압도적 풍경보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맺힌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돌 깨는 소리. 벗은 웃통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기계처럼 반복되는 망치질. 조그마한 체구, 순박한 외모의 노동자들. 영화 내내 내 가슴을 짓뭉개는 것은 절경 속에서 부서지고 세워지는 건물들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그게 사실 영화의 핵심이었다. 다음은 자이징커의 말.
나는 이 영화에서 (부서져 가는 도시의) 풍경보다도 노동하는 사람들의 몸, 그 몸에 흐르는 땀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사회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보았다면 이제는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생각 둘. 왠지 모르게 이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혀 다른 영화다. 롱테이크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는 점, 축축한 습기가 화면을 넘어 전달된다는 점 등 비슷한 점은 많지만(생각해보니 많은데?) 그래도 <스틸 라이프>는 영화의 발언의 성격, 기초하고 있는 토대, 이야기의 구조가 전혀 다른 영화다. 하지만 보는 내내 <안개 속의 풍경>이 생각났다. 급기야 아래 장면을 볼 때는 ‘이건 혹시 오마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다.
***
생각 셋. UFO, 건물로켓, 외줄타기. 이 CG들의 목적은 뭘까? 영화에서 세 번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 초현실주의같은 장면들을 보고 ‘이게 뭐야’ 싶었다. ‘왜 흐름을 깨지?’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반대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어느 게 더 초현실적인 일일까? 산수화 같은 자연 아래 끊임없이 철거와 건설이 진행되는 장소 vs UFO. 기계처럼 끊임없이 망치질하는 노동자 vs 건물로켓. 돈을 주고 산 아내/결혼했지만 다른 도시에 사는 부부 vs 고공외줄타기. 감히 전자보다 후자가 더 초현실적이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한산밍은 나의 이종사촌 형입니다. 그는 고향에서 실제로 광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플랫폼>과 <세계>에서도 광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광산촌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광부는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그래서 돈을 주고 사는 수가 많습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셴홍은 남편을 찾으러 이곳에 찾아옵니다. 결혼했지만 서로 다른 도시에서 헤어져 살고 있는 부부들은 언젠가 결정을 해야 할 일과 마주칩니다. 지금 이런 일이 중국에서 매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
<스틸 라이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이란 다큐영화도 같이 봐야한단다. <스틸 라이프>도 다큐feel이 강했는데 아예 다큐라니. 조만간 찾아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아장커의 말 두 개.
예술가 혹은 지식인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힘들어, 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실의 무게 아래에서 그걸 다 들고 서서 버티며 진정 힘든 것은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현실은 험난하고, 그 현실을 떠받치고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민, 그들의 힘이 이 힘겨운 세상의 현실을 떠메고 온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근대화, 자본주의화, 세계화, 그 안에서 사람의 중요성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중국 영화가 중국을 찍기 위해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시급합니다. <삼협호인>은 그것을 하소연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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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19 02:29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그리고 1978년 여름이 되자
(여기서 1978년은 1987년의 오타다. 썅, 편집자는 뭐한거야, 이런 중요한 대목에서 오타를 내다니.)
베드로의 집에서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다. 뿐만 아니다. 단순 교통사고가 간첩을 잡은 영웅적 행위로 둔갑하는 소설 시작에서부터 주인공 소년의 초능력이 사용되는 곳이 대공분실이 되고, 소년을 도와주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데모꾼들이며, 그토록 찾고 싶었던 어머니는 월북가정의 아픔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 등등 이 <원더보이>란 소설은 정치적으로 해석하게 밖에 없는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게 단순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80년대 군부독재시기에 대한 설명을 넘어 정치적인 이유는 소설이 구체적으로 다루는 하나하나의 정치사회문제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2012년 오늘 우리사회를 떠올리게 해서겠지. 가령 소설에 나오는 동아일보 언론자유화운동(이건 엄밀히 70년대일이지만)은 mb정부 들어 심각하게 진행된 언론장악, 구체적으로 YTN사태와 최근 MBC 파업을 떠올리게 한다. 철거반원들과 공권력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동네는 2009년 겨울, 용산 남일당에 다름 아니다. 소설 속 ‘침묵까지 포한한 25행의 시’ 중 ‘금강산댐이 터지면 국회의사당이 완전히 잠긴다는 뉴스’,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라고 말한 국회의원이 체포될 때’, ‘건국대학교에서 농성을 벌이던 대학생 1289명이 구속될 때’ 등 1986년의 사건들이 결코 옛날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2012년 오늘이 실상은 그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야만의 시대라는 사실 때문이며,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고 함께 분노하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작가 김연수가 이 소설을 쓰며 노린 것일 테다. 그렇게 이 정치적 소설 <원더보이>는 읽을 수 있는데,
문제는 나머지 부분들. 소설은 이렇게 정치적 사건들 말고도 주인공의 초능력, 신비한 빛, 미스테리한 엄마의 존재 등 이것저것 굵직굵직한 것들을 건드리는 듯 한데, 주인공의 초능력 중 다른 사람을 공감하게 하는 능력의 경우 그게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동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정치적 테두리 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쳐도 나머지 부분들은 솔직히, 이게 뭔가 싶다.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별에 관한 이야기는 맥락에 안 맞게 너무 붕 뜬 느낌이다. 내용은 알겠다. 어찌됐건 이 <원더보이>는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까. 근데 그 별과 우주와 나와 존재가치에 대한 부분들이 이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공아저씨 에피소드와 이만기와 쌍둥이 이야기, 희선의 애인 이수형에 대한 부분도, 이수형의 경우 뭐 정치적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소설을 양적으로 풍부하게 한 면 말고 뭔가 더 대단한 것을 이루는 데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쉽게 말해, 하나의 장편소설이 아니라 여러 단편들의 집합 같았다고나 할까. 어쨌든 김연수의 전작들이 비교적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 책을 덮을 때면 뭔가 가슴속에 묵직한 것이 들어앉는 반면 이 <원더보이>는 어색한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춘 탓에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후에도 뭔가 허전함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내가 이 소설의 진가를 제대로 못 본걸까. 뭐, 그래도 어쩔 수 없고. 어쨌든 마무리는 연수 형의 바람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다짐'.
내가 이 소설의 진가를 제대로 못 본걸까. 뭐, 그래도 어쩔 수 없고. 어쨌든 마무리는 연수 형의 바람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다짐'.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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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9 00:39이게 뭐야, 안 볼란다 나는
OME! 시작하고 한동안 쏟아낸 탄식들. 아. 뭐지 이 작가미상의 영화는? 이게 허진호 영화인가? 왜 이렇게 변한건지, 쇼트가 뭐 이리 많아? 가슴을 후벼 들어오던 그 느린 호흡은 어디 간 거지? 장면 장면 캡처와 동시에 훌륭한 그림이 됐던 그 영상은 온데간데없고(이건 그래도 뭐 이해할 수 있어), 숱하게 보아왔던 어정쩡한 영화가 왜 내 눈 앞에 있는거야? 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누가 허진호를 변하라고 한 거지? 왜 변신에 안달난거야? 왜, 왜, 왜.
그렇게 30분쯤 지났나. 드디어 허진호스러운 장면들이 좀 나오더군. 가령,
라던지,
같은거. 이런 게 허진호다운 거잖아. 근데, 이게 영화 끝까지 이어지지 않더군. 제일 불만인 게 뭐 그리 잘게 잘라났어? 그리고 왜 그리 급하게 넘어가? 휴우-하고 느낄라 치면 툭툭, 샥샥. 이거이거, 참. 어쨌든 실망.
2.
내가 멜로물을 볼 때 보는 건 이런거야. 어차피 멜로물은 다 정석 같은 게 있잖아. 먼저 어떻게 서로에게 빠져드는가. 두 번째로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흔히 섹스). 세 번째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위기. 마지막으로 그 위기의 극복. 요렇게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멜로물들은 거의 99% 이 정석대로 흘러간다고. 이 지겹고 익숙한 스토리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날 때 내가 생각하는 건 이런 정석대로의 흐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리고 매 단계에서 얼마나 참신하게 그것을 다루는가, 독자/관객의 이해를 구하려고 억지를 부리진 않는가, 어떻게 하나의 단계를 뒤틀어놓아 사람들을 환기시키는가, 혹은 하나하나에 얼마나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투영하는가, 뭐 그런거야.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이게 내 가슴을 얼마나 울리는가 하는 거지만 누구 말처럼 장례식장에서 흘리는 눈물의 절반은 자기의 설움이라고 그건 어차피 개인의 경험에 달린 문제니 나처럼 찐따같이 사는 놈은 어지간한 러브러브스토리엔 가슴이 흐물흐물해진다고.)
가령,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보자고. 이건 전형적인 멜로물의 형식을 따르면서 위의 네 단계 중에 세 번째를 극화(極化)하지. 중년의 백인여성이 모로코 출신의 젊은 이방인과 사랑을 하면서 발생하는 위기, 특히 사회하층에 속한 독일여성이 주변의 배타적 시선에 두려움을 느껴 스무살 어린 연인을 외부로 쫓아내는 장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파시즘의 향기를 다시 맡게 되는거야. 이건 이주노동자 문제로 사회혼란이 펼쳐지는 유럽사회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거라고. 그렇게 영화는 정치적이 되는거지. 멜로/로맨스/애정으로 분류된 이 영화에서 말이야. 또 다른 예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 사실 나는 이 영화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어. 그건 이 영화에서 세 번째 단계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는 거야. 보호자도 없는 장애여성과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걸 누구나 알잖아. 영화는 이걸 퉁 쳐내면서 각자에게 상상의 책임을 넘겨버려. 그리고 바로 네 번째로 넘어가는 거지. 그게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영화를 그래도 많은 영화인들이 추천영화에 넣는 이유라고 생각해 나는 말이지.
본론으로,
<봄날은 간다>는 적어도 이런 네 단계 구성에 있어서 적어도 나에겐 완벽한 영화였다고. 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였어. 아직도 다시 보면 감탄사가 나오는 영화라고. 첫 번째 단계, 상우랑 은수가 서로에게 호감을 얻게 되는 과정을 보자고.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 눈 내리는 고요한 사찰 풍경 소리. 대사 한 마디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걸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고. 두 번째 단계는 그 유명한 “라면 먹고 갈래요?” 세 번째는 더 유명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렇게 파고들다 네 번째 단계에서 화룡점정을 찍는 장면이 이런 거였잖아.
이렇게 참신하고, 기깔나고, 스타일리쉬한 멜로물을 보지 못했어. <봄날은 간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근데 <행복>은 뭐야. 무색무취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영수(황정민)를 떠나보내는 은희(임수정) 시퀀스로 잡은 거 같은데 그거 별로였어. 은희가 달리다 쓰러지는 장면은 애절하기보다 억지스러웠다고. 집을 나가는 영수를 카메라로 잡고 사운드로 은희의 울음소리를 내보내는 건 촌스러웠고 말이야. 그나마 1, 2단계는 봐줄만 했어. 제일 별로였던건 4단계야. 굳이 다시 만나야 돼? 영수는 폐인이 되어야 돼? 너무 전형적이였어, 너무. 그냥 퉁 쳐내버리는 게 나았을 거 같다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은 한석규의 장례식에 심은하가 찾아가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이런 내용적인 거보다 더 실망스러웠던 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스타일이 사라진거야. 쇼트의 난사(물론 상대적으로), 짧은 호흡(이것도 물론 상대적으로). 난 빠져들고 싶다고. 좀 천천히 물에 몸을 적시고 싶다는 말이야. 근데 그러지 못했어. 짐 캐리의 코메디를 기대하고 본 영화가 <이터널 선샤인>이었던 날 만큼 실망스러웠어. 사실, 변신? 그런 거 필요없어. 잘하는 거만 해. 이나영한테 바라는 것도 그런거야. 그냥,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거만 하라고. 4차원 연기. 로버트 드 니로도, 알 파치노도 하나의 이미지를 먹고 산다고.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믹스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런 거란 말이야. 허진호 감독이 혹시라도 변신하고 싶으면 말이지, 멜로 말고 다른 장르에 도전해봐. 괜한 스타일을 변신시키지 말고 말이야. 어제 <스틸 라이프>를 보다 잤는데 이런 장르도 어울릴 것 같다고.
3.
얼마 안 있어 <호우시절>을 볼 생각인데, 아, 제발. 내가 만나고 싶은 허진호가 거기 있었으면 좋겠어. 제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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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7 12:44예정된 패배―사랑과 기억과의 투쟁
“(그의 영화를 보고) 당신이 유혹에 넘어가든, 말든 그건 당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의 문제이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긴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게 되는 거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긴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게 되는 거다.
* * *
<동사서독>을 다시 봤다. 10년 만이다. 다시 봐도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다. ‘재미를 능가하는 압도적 지루함’이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인다. 아니 알았더라도 그 심도를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좀 더 깊숙이 마음을 파고든다. 나이가 들면 더 그러려나? 그때는 정말 아플 것 같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사랑을 조각낸 후 재배열한다. 시간순서도 미로처럼 엮어놓아서 느리디 느린 템포로 흘러가는 영화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사실,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르겠다). 영화 막바지―양가휘와 장만옥의 대화에 이르러서야 영화 내내 궁금했던 여러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동사는 왜 그리 여자들을 울렸는지. 서독의 형수는 왜 서독을 따라 나서지 않았는지. ‘취생몽사’의 진의는 무엇이었는지 등등.
여러 에피소드들이 엮여 있지만 이 모두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기억과의 싸움'으로 퉁쳐진다. 황량한 사막에서, 깊은 동굴에서, 아니면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그들 각자가 벌이는 이 싸움은 사실 이미 패배가 내정된 싸움이다. 시간은 내편이 아니다. 망각의 자유도 없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도 잊혀 지지 않고, 잊으려 노력할수록 또렷이 기억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취생몽사는 그녀가 내게 던진 농담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어쩌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일회성’이라는 삶의 비극 아래, 한 번 엇갈린 순간 이후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남은 인생을 내내 곱씹고 또 곱씹어보면서 복기하는 것. 후회하고 자책하고 미칠 지경이 될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씁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얻지 못한 사랑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동사서독>을 다 본 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불을 뒤척거리다 얼마전 시집에서 읽은 문장 하나가 생각났다.
언제나 조금 늦거나 빨리 오는 것들이 있네. 가령, 당신……고백……
― 이장욱, 2011,「평균치」,『생년월일』, (주)창비, p.28
* * *
덧붙이는 말.
하나. 소설 영웅문을 읽고 난 후 다시 <동사서독>을 보면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제목에 낚여서 극장에 왔다가 ㅆㅂ거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에서 ‘원작― 김용’을 발견하고는 ‘뭐라고, 이 ㅆㅂㄹㅁ’ 했겠지. 후훗―.
둘. 장만옥이란 배우를 왜 미처 몰랐을까. 아니 이 나이쯤에서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배우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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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5 10:22속도, 빛의 질감, 거울...그리고 장만옥
공기의 질감까지 느끼라는 듯 천천히 흘러드는 영상, 보는 이들을 축축 젖게 하는 빛과 색, 툭, 툭 생략된 채 날아오는 이야기의 파편들, 위험하고 치명적이게, 하지만 또 가냘프고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시키는 bgm. 보고 있자니, 녹아 내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 것이지 못했던 사랑과 얄궂은 운명을. 뒤늦은 후회와 자책.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소용없을 그 시절. 그 날, 햇살을 나눠받으며 걸었던 그 거리. 뜬금없는 나의 말에 당황하던 너의 표정. 그 속의 감춰졌던 미묘한 긴장. 사실을 알고 난 후 수해처럼 찾아 온 허탈감. 손이라도 잡아볼 걸 그랬어. 이제는 말할 곳도 들을 곳도 없는, 과거 아닌 과거의 흔적이 되어 버린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무엇을.

생각한다. 내 것이지 못했던 사랑과 얄궂은 운명을. 뒤늦은 후회와 자책.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소용없을 그 시절. 그 날, 햇살을 나눠받으며 걸었던 그 거리. 뜬금없는 나의 말에 당황하던 너의 표정. 그 속의 감춰졌던 미묘한 긴장. 사실을 알고 난 후 수해처럼 찾아 온 허탈감. 손이라도 잡아볼 걸 그랬어. 이제는 말할 곳도 들을 곳도 없는, 과거 아닌 과거의 흔적이 되어 버린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무엇을.
잘 만든 영화다. 사실 매우 간단한 내용을 몇 안 되는 장소에서 별 다른 잡피소드(잡것+에피소드) 없이 요렇게 만들었다. 대가의 냄새라고나 할까. 그런 게 난다.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 왕가위는 속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였다. 빠르게 건너뛸 때도, 느리게 흘러갈 때에도 그는 속도가 수단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색과 빛, 음악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거야 <중경삼림>, <타락천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왕가위의 ‘종특’인데, 여기다 예전에는 잘 느낄 수 없었던 무게감, 밀도까지 입힌 느낌이다. 가장 놀란 건, 사실 이것도 예전부터 장기처럼 썼던 건데, 거칠게 말해, 박지성급 공간창출능력이라고나 할까, 그 좁디좁은 공간을 거울을 이용해 풍성하게 팽창시켰다.(덧붙여,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본다. 우리 역시 거울을 통해 그들의 시선을 확인한다. 그렇게 마주하는 그들의 세상은 어딘가 이질적이고 위태롭다. 너무 쉽게 깨질 수 있어서인가.)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 자체보다 등장인물에 빠져들어 나중에 영화를 떠올리면 그 배우의 이미지만 남게 만드는 여배우/캐릭터가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색,계>의 탕웨이가 그랬고, <아는 여자>의 이나영이 그랬다. 그리고 이제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그럴 차례인가보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치파오를 입은, 위태위태해보일 정도로 삐쩍 마른 장만옥을 보면서 헉, 했다. 또각또각 걷는 게 왜 그리 아름다운지, 아, 치명적인 매력이란게 이런 거구나 싶더라. 이건 영하 형도 마찬가지였는지 책에다 이런 문장을 남겼다. “<화양연화>에서 그녀가 국수집 골목을 슬로우 모션을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올라갈 때, 나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100% 동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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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14 22:24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그자는 시인이다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기하려다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
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
슬픔은 말하자면 비자금 같은 것인데
슬픔을 저축해둘 걸 그랬어 아이들 듣는데
그런 소리 마라 아이가 자라면 죄도 자라는 것이니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
도대체 이놈의 문장은 구속을 담배에 불붙이듯 한다
담배에 불붙이며 중얼거린다
죄를 병처럼 끙끙 앓는 그의 몸은 세찬 바람이다
바람소리에는 운명이 들어 있다 아니 미래의 미지가 들어 있다
어떻든 간에 그자는 시인이다
시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좋은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경배하게 되는 반면 가뜩이나 미천한 나라는 존재는 너무너무너무 초라해져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이 사람들이 나랑 같은 세계에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느끼고, 같은 말을 쓰면서 같이 살고 있나? 그게 잘, 믿겨지지 않는다.
이 시에서 왠지 모르게 2연이 맘으로 들어왔다. “문장을 들고/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특히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요 문장이.
요 다음 연의 첫 행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와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도 가슴을 무겁게 두르렸다. 이유를 억지로 찾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그랬다.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사라진 계절
사자별자리 자취를 감추자 봄이 갔다
꽃이 피었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날이었다
문을 닫는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 쾅, 하고 닫혔다
고통이란 자기를 둘러싼 이해의 껍질이 깨지는 것이었다
전갈자리별 자취를 감추자 여름이 갔다
초록 나무에도 그늘이 짙은 그런 날이었다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노랑발도요새가 자취를 감추자 가을이 갔다
고독이 지쳐 뼈아프게 단풍 드는 그런 날이었다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란 걸 아는 순간 내 속에 피가 졌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흰꼬리딱새가 자취를 감추자 겨울이 갔다
몸이 있어서 충운 그런 날이었다
안다고 끝나는 게 세상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
내 안의 어둠이 쏟아졌다
이 세상 와서 내가 없는 계절은 없을 것이다
요 두 시를 읽으며, 내 인생의 봄을 생각한다. 봄은 다 져 버렸다. 어영부영 하다보니, “우두커니 서 있다”보니 어느새, 봄이 다 가버렸다. 아마, 여름도 그렇게 지나가겠지.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와 닿는다. 가라앉는다. 침전한다. 앙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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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4 15:25영화가 재밌으면 됐지, 뭐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Howl's Moving Castle
-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 출연
- 바이쇼 치에코, 기무라 타쿠야, 미와 아키히로, 가슈인 타츠야, 카미키 류노스케
- 정보
- 로맨스/멜로, 판타지, 애니메이션 | 일본 | 119 분 | 2004-12-24
사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D의 추천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정성일이 쓴 평론을 읽은 다음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믿고 보는 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음악도 좋고, 그림체도 좋고, 배경도, 내용도 좋지만 뭐니뭐니해도 상상력! 야, 어떻게 요런 생각을 했을까, 하, 그걸 또 요렇게 표현하네, 뭐 그런 거에 감탄하면서 두 시간을 쓰는 거다. 별로 아깝지가 않다. 그래서 어제 본 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
시작하자마자 뿅 가더만. BGM이 은은하게 깔리면서 이건 중세도 아니고 현대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도 아닌 이상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첨단의 과학기술과 사라진 문명수단들이 용액처럼 한 데 녹아있는 이상한 세계, 괴상한 인물들을 펼쳐놓았다. 대단하다 대단해. 더 대단한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스크린을 통해 접하는 관객들이 5분 만에,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놀랍게도 하야오의 세계에 적응한다는 사실! 요정도면
영화 내용은 착하디 착한 이야기. 다 보고 나니 생각나는 게―<매트릭스 1>?
네오(앤더슨)와 트리니티/하울과 소피의 관계 사이의 유사성. 잠수함/성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레지스땅스적 역할. 앤더슨이 트리니티의 사랑을 통해 네오로 탄생, 재생하는 것처럼 하울도, 소피도 상대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저주를 극복하고 젊음/생명을 얻는 일 등. 뭐 끼워 맞추기지만 비슷하더라고.
물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매트릭스 1>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그래도 유사성은 또 존재하는데, 요건 조금 나간 이야기지만, 둘 다 지극히 반동적이라는 사실. 현실과 가상, 실제와 본질을 전환시켜 현실감각을 무너뜨리는 <매트릭스 1>가 얼핏 보기에는 親혁명적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영화는 지독한 ‘영웅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앤더슨은 왜 네오일까. 그냥, 네오니까. 세상을 바꾸는 건 누구일까. 네오. 왜? 네오니까. <매트릭스 1>에 따르면 결국 매트릭스를 무너뜨리는 건 네오다. 그가 영웅이 되는 이유는 전체 대중들의 선택의 결과도, 자신의 절절한 노력의 대가도 아니나. 그냥 그가 영웅이 될 운명인거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영웅’이고, 그것도 이미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돼 있으며, 나머지는 이 영웅을 보좌할 역할에 있다는 주장. 요건 영웅주의다. 반동적이다. 다음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현실을 동화로 만들어 버린다. 하야오의 영화만 보면 행복해진다. 살아있기를 잘한 거 같다. 착하게 살아야 될 것 같다. 근데 그게 좋은 게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성일이 <오아시스>를 보고 쓴 평론이 잘 설명해준다. 길게 인용하면,
영화 <오아시스>가 만들어놓은 그 자리에서 나와, <오아시스>가 끝나고 난 다음 한공주와 홍종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별 네개를 달고 나와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내와, 결코 여동생을 내주면 안 되는 가난한 오빠 가족을 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약간 눈물을 흘리고 감동받아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영화관을 나설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실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당신은 감동받은 것이 아니라 안심한 것이다. 저 황량한 세상 속을 환상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진심을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해심과 자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교착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환상을 부추기기 때문에 역겨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환상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와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하고, 그래서 감동을 받았다고? 어떻게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할 수 있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자리만이 숭고하고, 자비로우며, 안전한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다. 하긴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일을 잊고 영화관에 온다는 것은 그만큼 비겁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영화 속의 주인공이 괴롭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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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12/02/13 20:23자학과 가학의 화려한 탱고!
오랫동안 외롭게 살아본 사람들은 의외로 그렇게 살아내는 방식들은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소식(小食)을 하다 보면 양이 줄어들 듯이 인간이라는 것도 만나지 않다 보면 필요량이 감소한다. 물론 자기연민은 금물이다. 자기 연민은 가끔이야 달콤할지 모라도 오래 하다 보면 괴물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기 연민은 에일리언처럼 숙주를 완전히 먹어치운다. 나는 바보다. 매력도 없다. 사람들이 나를 벌레 보듯 여긴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나를 피하지. 내가 잘하는 게 뭐 있겠어? 물론 이런 자학에는 쾌감이 있다. 문제는 스스로 효과적으로 잘 괴롭혀본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다시 더 가혹한 자학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자학과 가학의 화려한 탱고! 그러므로 자기 연민은 금물이다. 그저, 침묵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 그리고 음악이나 일에 몰두할 것. 그는 그렇게 살아왔다.
― 김영하, 2001,『아랑은 왜』, (주)문학과지성사, pp.184-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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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3 13:56논리적인 것과 상상력은 별개이거늘
보고 나서 든 두 가지 생각―
하나, 만약 지금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꿈이라면 현실의 나는 천재다. 이렇게 real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니. 아니면 현실세계가 꿈의 세계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른 사회이거나.
둘, 유물론자들은 이런 영화를 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식의 공상을 하기엔 너무 논리적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런 질문은 참신하더라. 꿈은 어떻게 내가 이 세계에 들어왔는지 모른 채 전개된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세계에 당신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고 해봐야 서너살 때니. 그러면 내가 지금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주입된 것이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냐면, “아니올시다.” 나의 역사를 증명해줄 사람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누가 증명해주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글쎄, 아마 인간을, 스스로를 너무 크게 보니까 나오는 거다. 인간은 죽으면 똥 된다. 철저하게 물질이고. 그냥 유기체로서 호흡하며 살다가 수명을 다하면 가는 거다. 요렇게 생각하면, 슬프다. 팍팍하다. 근데 어쩌냐, 이게 리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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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13 13:01what, how, when, where
읽을 만한 게 하도 없어서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읽었을 땐 “참신한 맛은 있지만 재미는 없는 소설이네” 했는데, 웬걸, 다시 보니 김영하가 이걸로 유명세를 탄 이유를 알겠다. 그래서 다시 정리: 김영하의 장편소설 중 내용면에서는 『검은 꽃』이, 재미면에서는 『퀴즈쇼』가 최고라면, 형식면이라고 할까, 뭐 말은 안되는 표현이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아랑의 왜』가 제일 낫다.
What보다는 How
예전에는 분명히 이야기 자체에 끌렸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그 이야기는 어떤 소재를 다루었고, 어떤 당파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결말을 이야기하는가. 마찬가지로 여기서 이야기는 레알리티가 있느냐, 왜 하필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했는가 등등.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걸로 가치를 매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확실히 어렸던 것 같다. 어려서 제대로 된 맛을 몰랐다. 고기부페에 가서 아이스크림만 먹는 아기들처럼 말이다. 지적수준과 경험이 일천하여 그냥 이해하는데 급급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다. What도 중요하지만 How도 중요하다, 아니 소설과 영화와 같은 작품들에서 quality를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What보다도 How다. 아무리 좋은 소재와 내용도 형식이 유치하고 촌스러우면 허섭스레기가 되고 만다.
『아랑은 왜』는 바로 이 How에 관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있다. 어떻게 풀 것인가.
요걸로 설명문이 아닌 소설을 한편을 써냈다. 아, 참신하도다.
여기에 대해 길게 글을 쓰려했는데 잘 정리된 글이 있어서 링크(링크)
What, How 만큼이나 When과 Where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써져 있느냐 만큼 중요한 게 바로 언제 이걸 어디서 읽었냐 하는 거다. 김영하가 『랄랄라 하우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이름은 빨강』을 서울 대학로에서 읽는가와 터키 이스탄불에서 읽는가는 천지차이다. 비슷하게, 내가 스무살 대학입학 직후에 『상실의 시대』를 읽고 느끼는 감정과 서른살에 읽으면서 느끼는 애잔함의 깊이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고. 따라서 어느 시점에 어떤 환경(공간적 의미를 넘어서)에서 책을 읽는냐 하는 것은 독서의 결과에 굉장히 중요하다. 이번에 『아랑은 왜』를 읽으면서 동시에 <인셉션>을 보았고, <불신지옥>을 봤더니 자연스럽게 이 세 개가 믹스가 되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예컨대 <불신지옥>: 이렇게 좋은 소재로 요로코롬 밖에 못 만드나, 하는 생각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요즘에 책을 읽으면서 현실을 초월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도 사실 이 When/Where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뭐랄까, 지금은 뭘 읽어도 그냥 평가하고만 싶지 이걸 통해 내 발전의 계기로 삼자, 더 노력해야한다 하는 자기발전적 결과를 얻기 힘든 상황이다. 내 마음/상황이 그렇다. 물론 자기발전은 사후 추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시기다. 깊은 독서가 불가능한 시기. 슬프다. 병신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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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07 11:52다시 영화의 세계로
주말에 영화를 몰아서 봤다. <도가니>, <완득이>, <말죽거리잔혹사>, <써니>, <반두비> 이렇게 다섯 편. 순서대로.
<도가니>는 예상한 것보다 잘 만든 영화였다. 소설보다 나은 것 같다. 영화라는 매체의 힘이라고나 할까, 글로 자질구레하게 설명해야 했기에, 그래서 실제 사건임에도 너무나 전형적이라는 비판(참고)에 직면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매체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적었다. 다 아는 내용임에도 러닝타임이 지겹지 않았으니 그만하면 됐지 뭐, 그렇다고 다시 보고 싶을 정도의 수작은 아니었던 것 같고.
<완득이>는 그냥 유쾌한 영화. 생각할 게 많은 것 같지는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재밌게 봤다. 원작은 안 읽었는데 안 읽기를 잘한 듯.
<말죽거리잔혹사>는 D와 같이 봤는데, TV에서 대충 본 것까지 치면 한 대여섯번 봤나. 예전에 많이 보였던 장점이 이제는 애써 찾으려 하지 않으니 보이질 않네. 좋은 것도 너무 많이 보면 안 돼.
<써니>는, 휴. 이걸 700만이나 봤다고? 이걸 극장에서 어떻게 끝까지 보고 있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80년대를 아주 조악하게 다뤘다, 조악하게. <말죽거리잔혹사>에 비교하면...벨/붕. 게다가 어처구니없는 결말. 이게 해피엔딩인가. 간단히 요약해 ‘친구를 웃게 해주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이 저열한 결말을 보고 서민들이 느꼈을 감정이 뭘까. 그냥 넘어가나? 적어도 나는, 굉장히 불쾌했다.
마지막으로 <반두비>. 잘 만든 영화지만 역시 저예산영화다운 모습. 그래도 참신한 맛. 이주노동자의 불편한 진실마저도 편하게, 쏘~쿨!하게 넘어가는 세상이라 뭐 소재가 땡기는 맛은 덜하지만 그걸 이주노동자와 고등학생의 사랑이야기로 요로코롬 풀어내다니! 그리고 살아있는 캐릭터s. <똥파리>도 그렇고 저예산영화가 히트치려면 사회일반의 시각에서 독특하지만 분명히 매력덩어리인 캐릭터를 세워놓고 봐야겠다. 주인공 민서, 요 캐릭터 아주 맘에 든다. 그리고 그걸 연기한 백진희.
탕웨이에 이어 앞으로 작품을 찾아보게 될 요배우 발견. 요게 이번 주말 가장 큰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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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03 21:34위기의 증거
얼마 전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질문 글을 하나 올렸다. 최근 들어 한국소설의 수준이 세계소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여기저기서 비판이 많은데 정말 그런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하는 내용이었다. 몇 개의 답글이 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읽을만한 장편들이 없죠. 장편에서 수준차가 가장 클듯. 그리고 인재가 안몰리는 것도 한몫할듯 싶네요. 영화만 해도 엘리트들이 유입되는 시기가 있었으나 문학은 아니었죠. 지금도 상타는 애들 보면 거의 문창과 출신들.
단편 집중적인 기형적인 구조. 주례사 비평이라 불리는 칭찬 일색의 비평들.
그로 인해 장편은 구성 및 형식이 안습 수준. 문체 중심의 사소설 경향이 득세. 뭐 총체적 난국이었으나 요즈음 그나마 많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문학상단편집은 나오는 작가가 거의 정해져있죠. 안보고도 예상가능;; 장편 신인 뽑는 문학상 수상작보면 처참한 수준..; 뽑는 심사위원 수준까지 의심하게 만드는데 얼마나 없었으면 싶을 정도인 것도 있더군요. 태생 한국인도 공감못하는데 번역되서 팔려나가는건 언감생심..
생각해보니,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말고 와, 하는 감탄사로 기억되는 장편소설이 없다. 단편소설 중에는 뭐 가끔씩 괜찮다 싶은 걸 발견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날 정도로 무게감 있었던 건 몇 개 없었던 것 같다. 김영하가 편해영의 『통조림 공장』을 읽고 남긴 비판―링크. 맞는 말처럼 보인다. 위기는 위기다.
어제하고 오늘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를 읽었다. 책 뒤편의 작품해설에는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節)로 된 장시(長時)”,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보는 눈이 형편없어서 그런가, 이게 바로 ‘주례사 비평’인 거 같다. ‘구성 및 형식이 안습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어설프고, ‘문체 중심의 사소설 경향’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폭력이 폭력답게 거칠게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하고 의연한 사랑. 희망까지는 안 되도 위로는 될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주제는 뭐 그렇다지만 그걸 이야기로 풀어내는 힘이 확실히 부족해 보인다. 일단 눈을 오래 잡아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참신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앞으로 한국소설을 고를 때는 서점에서 대충이나마 읽어보고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먹게 해준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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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사진 2012/02/02 11:06숨은 그림 찾기
숨은 그림 찾기. 아니지 월리를 찾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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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2012/02/01 13:11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대학교 1학년 때 D와 같이 <소설의 이해>란 강의를 같이 수강한 적이 있다. 교수가 선정한 소설을 수강생들이 읽고 그 소감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니 어떤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 하지만 염상섭의 『만세전』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확실히 이 수업을 통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정말 부리나케 다시 돌아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Shift+Delete 키를 누르고 싶은 망신스런 일 때문에 아직도 강렬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박태원의 이 소설을 읽고 각자 느낀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는 발표자로 지목됐다. 물론 지금도 형편없지만, 문학작품을 읽으며 그 속의 담긴 참뜻을 파악하는 일에 지금보다도 훨씬 서툴렀던 당시의 나는, 전년에 본 수능 언어영역에서 110점 이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언어’영역이 부족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해설을 보지 않으면 이게 왜 좋은 작품인지 모르는 경우가 일이 많았으니까.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도 마찬가지. 읽기는 쉽고 빠르게 읽었는데 이게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범인처럼 지목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와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입을 떼는데, 아―,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정도로 창피한 말들을 막무가내로 뱉어냈다. 뭐 그리 허세부리고 싶었는지, 개인과 세계가 어떻고, 카프카(먼 이국땅에서 고생이 많으셨다)가 어떻고, 존재가 어떻고, 실존주의가 어떻고. 한 3분 정도였나, 옆자리의 D가 창피할 만큼 횡설수설, 뚱딴지같은 발표를 마친 후 땀이 가득한 손을 말아 쥐고 자리에 앉는데 정말,
쪽팔렸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문제는 Next. 내 자다가 하이킥 쇼가 끝난 후 다음 발표자로 지목된 사람이 단상 앞으로 나갔다. 자연대 98학번인가, 왜소한 체격에 무슨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인지 얼굴 여기저기에 각질이 붙어 있는, 하여튼 후줄근한 외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꽤나 쑥스러움을 타면서도 그는 천천히, 하지만 똑똑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가 보기에 이 소설은 소설가가 자기 신분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고 말이다. ‘소설가는 왜 글을 쓰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거창한 그 무엇을 위해서인가.’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라고, 그는 말했다. 발표가 끝나고 교수는 이 형의 발표를 토대로 소설의 의미를 해설해줬다. 직업이 되어버린 작가. 그러나 작가는 직업으로 볼 수 있는가. 소설가는 무엇을, 왜 창조(해야만)하는가 등. 형의 발표와 교수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란 작품이 무척 세련된 소설이며 한 작가의 대단한 고뇌의 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숨고 싶어졌다, 구멍 찾는 쥐처럼.
* * *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를 읽으면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생각났다.
* * *
다 읽고 나서야 엉,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에피파니의 상태로 영적인 엑스터시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글을 썼다면 나는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요걸 읽었다. 정말 빠져들었다. 이런 소설, 특히나 김영하의 단편소설은 이게 단점이다. 결국 다시 봐야 한다. 그래서 복기.
주인공 ‘나’는 소설을 쓰려한다. 쓰기 싫지만 써야한다. 왜? 처음에는 돈 때문에. 나중에는 질투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냥 ‘빙의’ 돼서. 그에게 소설을 쓰게 만드는 주체는 다양하다. 질투를 유발하는 전부인, 미국유학을 꿈꾸는 딸, 골드만삭스 출신의 사장, 거기다 철학교수 시인 친구까지. 사실 창작가가 아닌 평민의 시각에서 보면 소설을 쓰는 데 있어 무엇을 쓸 것인가―이른바 주제―가 우선이고,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동기라 생각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어쩌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라는 존재란 그저 고객(또는 고용주)의 요청에 글로 이루어진 상품을 제공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작가는,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라는 소설가는 어떤 존재일까, 이런 의문 하나.
어쨌든 그는 여러 push에 맞춰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쓸게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미라클. 정말 기적처럼 뉴욕의 사장의 집에서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섹스를 나눈 후에야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될까, 이런 걸 써도 될까, 같은 자기 검열이 작동하지 않으니 서사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사장과 전부인이 상징하는 어떤 것―그건 자기를 이 뉴욕 땅에서 글을 쓰게 만든 힘,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평범한 모든 인간들을 아침 9시까지 회사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그 force로부터 일탈한 후에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 아닐까, 이런 의문 둘.
어쨌든 주인공이 만들어 낸 건 줄거리도 없는 난잡한 소설. 하지만 사장은 골드만삭스의 핵심답게 아주 잘 짜인 플롯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간다. 죽음의 직전에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닭과 옥수수’ 농담에 나오는 정신병자와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는 사장과 바람피우지 않았다. 철학교수 친구 놈은 개후레자식이었다. 지금까지 자기를 몰아세운 건 ‘닭’ 이 아니라 자기 자신 ‘옥수수’였다. 청산가리, 어쩌면 수면제를 먹고 난 마지막 순간에야 주인공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고 ‘읽는다.’ 지젝이 말한 농담에서 정신병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납득하였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기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냥 조크라 여길 수도 있지만 진지하게, 이 환자는 어떻게 완치될 수 있을까. 그가 옥수수가 아닌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외부의 시각에서 그가 옥수수가 아니라고 확증 지어줄 어떤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작가를 대입; 순수한 의미로서의 작가 ‘나’와 자본주의세계에서 작가 ‘옥수수’, 그리고 그 옥수수를 털어먹는(강제하는) 외부 ‘닭’. 좀 오버스럽지만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셋.
이런 의문들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주제와 이어진다. 작가란 무엇인가, 왜 소설을 쓰려 하는가, 이 사회에서 작가는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가. 김영하가 작년 초에 소조와 벌인 논쟁을 떠올리면, 그리고 작품집 안에 있는 자전소설과 수상소감까지 읽어보면 김영하가 생각하는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지 대충 그려진다. 읽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람. 세상에 인정받는 것보다 자기 안의 괴물을 어떻게든 꺼내놓고자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떠오르는데……프란츠 카프카? 그래서 가지게 되는 생각. 혹시 소설 속에서 ‘섹스를 한다’는 관념을 버리기 위해 철학교수가 바람을 핀다면 소설가는 ‘OO을 한다’는 관념을 버리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OO을 한다’라는 것이 ‘존재를 자각하기 위해’라고 생각하는 건 과한 것일까.
덧붙여서,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옥수수가 되기는 쉬울터. 나도 필요한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주문이. 그런데, 세상이 요지경이라 아무리 주문을 외더라도 효과가 없다. 그게 이 단편소설을더 서글프게 한다.
덧붙여서,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옥수수가 되기는 쉬울터. 나도 필요한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주문이. 그런데, 세상이 요지경이라 아무리 주문을 외더라도 효과가 없다. 그게 이 단편소설을더 서글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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