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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2012/03/27 11:55

오늘의 잡생각

스무 살에 사회주의자가 아니면 심장이 없는 것이고, 마흔 살이 되어서도 사회주의자라면 머리가 없는 것이다.

이 말을 백남준이 인용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아닌 것 같군. 어쨌든 이 격언(?)에 대해 어렸을 때는 ‘어마어마한’ 거부감을, 지금은 ‘어마한’ 거부감을 느끼는데, 그래도 일단 이 말이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지고 널리 사용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

예전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했다. 스무 살까지는 현실을 모르고 날뛰지만 마흔 살까지 20년 동안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세상이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기 때문이지. 인간이 그리 완벽한 동물이 아니며, 머릿속 이념을 발아래 현실로 만드는 일은 기적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누구나 마흔 즈음이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지금은 여기에다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다. 스무 살에는 살날이 많이 남아있어서 세상을 바꾸고 싶지만, 마흔이 되면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냥 살기에도 벅차다는 이유를 말이다. 어차피 쫑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바꾸고 자시고가 뭐 중요한 일이겠는가. 

하여 이런 생각도 가능. 만약 인간의 기대수명이 지금보다 약 2배쯤 늘어나 150살이 되면 세상은 좀 더 ‘혁명적’으로 바뀌지 않을까? 기대수명이 늘어나 사회적으로 노동해야할 시간이 2.5배쯤 늘어나게 되면 다수의 사람들이 '그냥 이렇게 살다 가지'가 아니라 '갈아엎고 다시 세우자!'로 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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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2012/03/26 14:35

슬럼프


기억하라,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 폴 발레리 

김영하의 『빛의 제국』의 카피로 인용된 문장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래, 항상 생각하면서 정신 차리고 세상을 살아야겠구나.” 하는, 아주 기특한 마음을 먹게 해주는 말이었는데,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개쓰레기에, 몹쓸 것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형편없는 것이라면, 
아니 그것보다,
거대한 세계 앞에 한없이 초라한 유한존재ㅡ인간이기에,
어차피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면,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패배할 운명이라면 용쓰는 게 더 비참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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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1 02:11

문제는 남는 씁쓸함



오늘의 거짓말

저자
정이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7-07-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의 신작 소설집! 낭만적 사랑...
가격비교


*

나는 단편보다는 장편소설을 좋아한다. 역사적, 사회적 변화나 그 속 인물들의 부침을 다 담기에 단편소설은 한계가 있다. 사건 중심, 등장인물의 양적부족, 사회ㆍ제도ㆍ가치 조명의 한계 등도 단점이다. 무엇보다 단편소설은 쉽게 읽히는 만큼 쉽게 잊힌다. 특히 누구누구의 단편소설집라고 한데 묶인 단편소설들은 한꺼번에 읽은 다음이면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분간이 안가 나중엔 제목도 기억나지 않기 일쑤다.
그래도 언제나 예외가 있으니, 어떤 단편소설집은 어지간한 장편보다 훨씬 큰 무게감으로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읽은 후 깊은 숨을 뱉는 동시에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조그만 수류탄에 천지가 진동하듯 얇은 분량으로도 세상과 시대와 삶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내가 읽은 한국소설집 중에 3권이 그랬다. 
그 중 하나, 김승옥의 『무진기행』.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한 번에 읽은 책인데, 다 읽은 후 서울역에서 내리면서 한동안 멍해 있었다. 한참 늦게 찾아온 비보(悲報)를 듣는 느낌. 40년 전에 나온 소설이지만 어제 갓 나온 소설처럼 세련됐다는 감탄과 함께, 그 시대의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내가 마침 고른 것이 그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걸작이란 행운을 느꼈던 책이다.
다음으로 박민규의 『카스테라』.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소설. 21세기 한국소설의 탄생을 알리는 듯 했다. IMF―97년체제 아래 생을 살아가야할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파격적 상상력으로 다룬다. 수록된 모든 작품에서 체제의 잔인함과 삶에 대한 연민이 우러나온다. 무엇보다 참신하다. 이제는 이런 박민규식 글에 익숙해진 탓에 그의 다음 단편집 『더블』에서는 예전의 충격을 접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박민규는 매 작품을 설레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읽게 되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작가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이 소설집.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이다.

**
소설을 투구에 비교하기. 직구 같은 소설. 이런저런 잡설없이 머리통을 향해 150km/h로 달려오는 소설. 읽는 동시에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즉시 들며, 꾸밈이 없는 만큼 묵직하게 구멍이 뚫리는 소설. 예로는 위에 말한 『카스테라』나 『죄와 벌』 등. 반대로 변화구 같은 소설. 날카롭게 곡선을 그리며 미트에 도달할 때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그래서 다 읽은 후에 무엇이 나를 들었다 놓았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소설. 예로는 『상실의 시대』 외 하루키 소설들. 그럼 정이현의 소설은 어느 쪽인가? 직구인가? 아니면 변화구인가?
내 생각엔 정이현의 소설(장편 말고 단편)은 직구나 변화구가 아니라 견제구 같다. 안전하게 출루한 주자가 방심하고 있는 순간 날카롭게 생존을 위협하는 봉중근의 견제구.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거짓말』 부록에 실린 해설의 제목, ‘당신은 파국으로부터 안전한가?’는 참 적절한 질문이다.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에 100% 만족하며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탈을 꿈꾸거나 전복을 상상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 그녀들은 자기 욕망의 매뉴얼에 따라 체제순응을 연기하는 여성들이다. 체제로부터의 일탈? 그녀들에게 그것은 체제가 부여하는 순진한 환상과 별다를 바 없는 낭만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체제로부터의 일탈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해버린 여성들인 것이다.”

자유의 대가로서 고독을 지불해야 하듯 이곳은 ‘기브 앤 테이크’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니까 말이다.(p.34)

물론 삶에 사건이 있듯이 소설에는 파국이 존재한다. 파국은 앞서 말한 견제구처럼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 순간 인물 앞에 <매트릭스>의 파란약과 빨간약처럼 두 개의 선택과 가능한 미래들이 등장한다. 리셋버튼을 누르고 미지의 길을 갈 것인가, 파국을 봉합하고 일상을 유지할 것인가. 여기서 정이현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후자를 선택한다. “모든 파국의 틈새를 집어삼키는 평온한 일상에의 욕망은 그토록 집요하다.” 문제는 소설이 아니라 우리. 파국은 소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도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인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그녀들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체제의 부당함보다 단단함을 느끼며 사는 21세기 한국시민이니까. 문제는 남는 씁쓸함. 무력감. 뭔지 모를 패배감 같은 것. 낭만적 환상이 사라지고 합리적 계산이 남은 세계, 혁명적 비전이 현실의 욕망 앞에 무릎 꿇은 시대에 이런 소설을 읽으며 욕조에 몸을 담군 것처럼 맥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기에 정이현의 소설은 어쩌면 가장 21세기 한국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세계8위의 경제대국, 100%에 달하는 대외의존도, 초호화명품관과 초고속통신망, 비정규직의 일상화, 워킹푸어, 하우스푸어, 극심한 청년실업과 계층간, 세대간 불화, 세계최고수준의 자살률……. 평온한 일상에의 욕망이 너무나 대단한 소망이 되어버린 시대에 정이현의 소설은 그녀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당연한 결말처럼 느껴진다.

*** 
정이현의 소설을 견제구라 한 또 다른 까닭=뜬금없이 찾아오는 예리한 문구. 가령 이런 식.

이제 그네들끼리 해결한 문제가 남아 있을 터였다. 타인들의 삶이었다. 나는 조용하게 발길을 돌렸다.(p.91)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보니까 글의 매력이 사라지네. 하지만 소설 중간에서 이런 문장들을 발견할 때마다 갑자기 하강하는 승강기에 탄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정이현의 다른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도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집. 하지만 『오늘의 거짓말』에 더 손이 가는 이유는 「삼풍백화점」이 실려 있기 때문. 이 단편소설은 읽을 때마다 마음속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특히 마지막 문장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를 몇 번이고, 정말 몇 번이고 계속 되뇌게 되었다. 대단한 소설. 하지만 통일성에서 봤을 때 이「삼풍백화점」은 단편집 안에서 약간 이질감을 초래하는 듯하다. 확실히 다른 단편들과는 뭔가 다른 파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 애초에 이「삼풍백화점」은 소설가들의 '자전소설'이라는 기획에 포함된 작품이라는데, 어쩌면 정말 이게 정이현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
마지막은「삼풍백화점」에 있는, 내가 정이현의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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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2012/03/08 16:59

For more creativity, Raise the roof!


내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FTA 관련 교육에 다녀왔다. 신규업무라 책임자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고, 회사라는 조직답게 아무도 앞장서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결국 회사 최고의 브레인이라 불리는 내가 가게 된 것이다. 뭐, 회사 밖으로 일찍 나가는 건 언제나 땡큐지만, 이건 교육장소도 너무 멀고(가는 데만 두 시간 반), 너무 늦게 끝나(6시) 선뜻 내키지 않았다. 그래도 일단 참석. ‘책이나 읽을까? 아니면 한숨 잘까?’ 요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막상 교육이 시작되니 웬걸, 너무너무너무 재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전혀 몰랐던 걸 배워서 그런지, 강사의 능력이 출중해서 그런지, 관세사 한명이 나와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지극히 평범한 형식의 교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겠더라. 최근 10년 동안 내가 들은 교육, 수업, 강연 중에 제일 재밌었다. 역시 나는 일하는 것보다 배우는 걸 더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하루.

*
이 교육 중 하나.



요 사진 속 자전거는 국제 발명품 대회 <Innovate or Die>에서 대상을 차지한 작품이다. 그냥 평범한 자전거처럼 보이지만 사실 요놈의 종특은 바로 ‘정수’ 기능. 아프리카 등 저개발국에 사는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없는 현실에서 출발한 이 제품은 자전거 안 탱크에 물을 싣고 페달을 밟으면 그 힘을 이용해 정수효과를 얻게끔 설계된 것이다. 오, 그래 이런 게 디자인이지. 근데 이런 건 <지식채널 e>에서 배우면 되는 내용. 정작 이 교육에서 다루는 건 인간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FTA와 관세, 무역이다. 여기서 강사가 질문을 던졌다. “만약 당신이 이 제품을 수입신고한다고 했을 때 품목분류를 자전거로 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수기로 해야 하는가? 정수기의 관세율을 5%, 자전거의 관세율은 8%다. 과연 이 제품을 자전거로 봐야 하나, 정수기로 봐야 하나?”

비슷한 질문을 계속 이어졌다. 면50%, 폴리에스테르50%로 구성된 옷의 경우 ‘면직물’로 봐야 하는가 ‘인조필라멘트섬유’로 봐야 하는가? 복합기는 주기능을 프린터로 봐야 하나, 복사기로 봐야 하나? 가정용 월풀은 ‘플라스틱제 용기’에 해당하는가, ‘마사지용 기기’에 해당하는가? 등등. 요런 알쏭달쏭한 사례들을 가지고 FTA와 같은 국제무역에서 어떻게 기준이 마련되고 상호간에 조정조율이 이루어지는지 설명을 듣자니 ‘오, 요거 한번 배워보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만. 

**
교육 중 또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 하나.
 


요 사람의 이름은 Jonas Salk. 1914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의사로 소아마비 백신을 개발한 사람이다. 195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아마비에 대한 별다른 치료방법이 없어 많은 아이들이 사지마비가 되거나 심한 경우 목숨을 잃었는데 그 백신을 이 Jonas Salk란 과학자가 개발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과학자로서 대단한 일인데 더 장하게도 Jonas Salk는 이 소아마비 백신에 특허권을 청구하지 않고 사회에 오픈, 인류공동의 재산으로 만들었다. 그 결과 소아마비 백신은 저가로 공급될 수 있었고, 저소득빈민들도 큰 혜택을 입을 수 있었다. 숭고하도다, 이 박애정신. (이 부분에서 강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근데 우리나라 기업들 봐요. ‘개같은’ 핸드폰 하나 만들어놓고 그걸로 돈 벌려고 핸드폰 요금 받아쳐먹는 꼬라지보면, 휴. 전세계 어디에도 우리나라처럼 통신비 요금 비싼 나라가 없어요. 정치인들은 뭐하나 몰라.” 이상 정확한 워딩이다.)
역시 여기까지는 <지식채널 e>에 실릴 내용. 내게 더 재밌었던 것은 <Jonas Salk Institute>. Jonas Salk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정부(?)에서 Jonas Salk 연구센터 건립을 추진하게 되면서, 혹시나 센터건립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원하는 바가 있는지 Jonas Salk에게 물어본다. Jonas Salk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소아마비 백신 연구가 계속해서 실패하고, 더 이상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을 때, 영국으로 여행을 갔다. 여행 도중 성당에서 답답한 마음에 바닥에 누워 천정을 보는데 뭔가 ‘휙’하고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백신을 만들 수 있었다.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영국성당의 높은 천정이 내 창의력에 도움을 줬다고 생각한다. 내 이름의 연구센터에 바라는 점은 단 하나. 건물의 층높이를 아주 높게 만들어달라.”
 
그의 뜻을 받들어 지어진 건물이 

그 후 이런 연구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2.45m 이상의 층높이를 가진 공간 안에 있을 때 사람들은 그러지 않은 공간에 있을 때보다 창의적이 된다. For more creativity, Raise the roof!” 지금 사무실에 와서 높이를 대충 재보니 썅, 2.45m 미만이다. 나는 남들보다 키가 커서 최소 3m는 되어야 환상적인 아이디어가 탄생할 것 같은데, 내 사무실도, 내 방도 협조를 안 해준다. 내 창의력이 여기 갇혀 질식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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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s Salk
2012/03/06 21:34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2-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운명과도 같은 그 목소리가 들리다!김영하식 슬픔의 미학을 보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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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소설가가 쓴 것이라도 단편과 장편은 그 맛이 다르다. 김영하의 경우는 특히나 그렇다. 그가 쓴 단편소설은 하나같이 UFO처럼 신기한 것들로 이야기 그 자체가 매력적이다. 그걸 풀어내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반면, 장편소설의 경우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한 화두가 인상적이다. 읽은 후 한참이 지나도 김영하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그 안을 맴돌며 의미를 곱씹게 된다. 
단편과 장편 중 무엇이 더 나은가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단편이든 장편이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김영하가 쓴 거라면 뭐든 좋아라하는 나의 경우, 그래도 꼽자면 장편이 좀 더 나은 것 같다. 아니 더 맘에 든다. 처음 이 소설가를 알게 된 것도 장편소설을 통해서였고 말이다. 지금까지 김영하가 써낸 장편소설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검은 꽃』, 『빛의 제국』, 『퀴즈쇼』 이상 총 5편. 하나씩 되짚어보면,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경우 ‘작가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소설처럼 보인다. 소설 속 다음의 문장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길.” 요걸 다시 한 번 음미. 
두 번째 장편 『아랑은 왜』에서 김영하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생성하고, 해체하고, 조립하면서 ‘이야기가 이야기로 되는 과정’, 그 본질을 탐구한다. 전작이 도달했던 자리에서 다시 성큼 앞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다른 포스트에서도 말했지만 확실히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최고소설이지 싶다. 그리고 그 다음은 『검은 꽃』. 
내 생각엔 이즈음에서 김영하 소설이력에 뭔가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문학동네에서 뿌린 자료에서 『검은 꽃』, 『퀴즈쇼』,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한데 묶어 ‘고아 트릴로지’라고 하던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검은 꽃』, 『빛의 제국』, 『퀴즈쇼』 요 세 개를 한데 묶어 ‘한국근현대 트롤리지’라 부르는 게 더 적당하다 생각한다. 『검은 꽃』에서 김영하는 우리민족이 근대에 어떻게 접속했는지를 되새기며 그 월경의 순간에 우리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 한 명 낱낱의 개인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싸늘하고도 차분하게 써 낸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식민지시대지만 시대와 세계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유한자 인간의 슬픔, 그 어쩔 수 없는 패배로 찾아오는 허무감은 시대를 초월한다. 우리에게 근대는 그렇게 찾아왔다. 
『빛의 제국』은 그 이후다. 20세기 전반전을 식민지로 보낸 한반도의 후반전은 분단이었다. 분단의 기형적 상황에서 세워진 두 나라를 김영하는 주인공들의 아비의 목소리에 담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넌 인간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니?”(북), “세금 무서운 줄 알아라.”(남) 분단이 빚어낸 ‘빛의 제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갈 곳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소설은 던지고 있다. 
다음으로 21세기. 『퀴즈쇼』는 IMF―97년체제 하에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빚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 고시원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IMF란 이름으로 불안의 시대에 접속한 너와 나의 모습이다. 패배가 용납되지 않고, 연대가 발 딛을 틈이 없는 삭막한 퀴즈쇼―회사의 세계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오늘날 한국사회에 다름 아니다. 하여 주인공과 같은 학번인 나는 소설을 읽으며 마치 내 일기장을 보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①근대와의 접속―『검은 꽃』, ②근대화(또는 현대화)―『빛의 제국』, ③근대화 이후―『퀴즈쇼』라고 할 수 있고, 이 세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이 있다면 그건 세계, 그 튼튼한 구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안에 담긴 절망과 슬픔이다. 따라서 세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드는 심상은 공통적인데 일단 우울해진다. 무력해진다. 무엇보다 서글퍼진다.

**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김영하의 다음 장편을 기다렸다. 전작과 달리 뭔가 삶을 긍정할 만한, 희망이라 부를만한 걸 기대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김영하는 그런 맛을 가진 작가가 아니다. 그런 건 다른 소설가한테 기대하면 된다. 기다렸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퀴즈쇼』 이후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한국근현대를 다 훑은 다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어디일까? 2주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전혀 김영하 장편스럽지 않은 제목을 알고 나서 궁금증은 더 심해졌다. 소설을 받자 마자 다 읽고 난 후, 두 번 읽고 난 후 솔직한 내 심정은, 뭐랄까, 약간 어리둥절한 마음이다. 김영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말 뜻밖에도 가출과 혼숙, 폭주를 즐기는 ‘일탈’ 청소년들이었다. 음―, 이게 뭘까.

쉽게 이해하면 이렇다. 소설을 읽으며 ‘와, 리얼하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이 ‘비행’청소년들의 세계는 누가 만든 것인가. 만약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기형적인 것이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기성세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들? 그래서 ‘너의 목소리’를 들어야 되고 고통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 안아야 한다는 사실? 다음은 이 소설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p.9)

하지만 이런 건 너무 식상한 주장이고 패턴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만든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럼 뭘까, 김영하의 의도는. 두 번이나 읽었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몇 개 짚자면,

***
소설은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문제의 근원을 밝혀주거나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주인공 제이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대폭주를 이끌며 ‘도시의 거리에 굵고 힘찬 붓질’을 하지만 그건 동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무나 무력한 시위다. 대폭주가 일회성을 넘어서는 행사가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의 클라이막스에서 제이는 대폭주 도중에 예수처럼 승천(昇天)한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날의 대폭주는 잊혀진 추억이 되어버린다. 예수와 달리 아무도 제이의 뜻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동규, 목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드로나 바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감히 비교하기도 싫지만) 제이의 죽음은 헛되어 버린다. 무력하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 어쩌면 이런 허무와 무력이야말로 김영하가 던진 공이 아닐까. 
주인공 제이는 세상에 두 번이나 버림받는 불쌍한 놈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가지게 된 능력―주위의 사물/인간과 공감하는 능력을 통해 남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능력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p.141)
 
허나 제이는 그 공감하는 능력으로 무언가 바꾸는 일에 하나같이 실패한다. 그는 다리 저는 붉은 도사견을 완전히 구출하지 못했고, 비행청소년들의 삶을, 악행을 바로잡는 일은 커녕, 지적장애를 가진 피해자 한나의 인식조차 바꾸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규와 목란의 삶도 지켜주지 못했고, 그를 따른 추종자들을 다 거두지도 못했다. 제이의 행적은 여러모로 예수의 행적을 빼닮았지만 그는 예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실패한 성자였으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지도자였다. 왜 김영하는 이런 실패의 이야기를, 무력한 이야기를 적어야 했을까. 그걸 통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줬으면 했을까.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궁금하다. 

****
다음으로, 설정과 장치 문제. 김영하는 (적어도 장편소설에서) 설정과 장치를 아주 정교하게 짜는 사람이다. 『퀴즈쇼』에서 MUSE의 <unintended>라든지, 『빛의 제국』에서 서울법대생과의 쓰러썸이라든지 소설 속 사소한 하나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이 김영하에겐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되는데, 가령 제이가 태어난 고속버스터미널. 그곳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꾸는 한편의 악몽 같은 공간. 길과 길이 만나는 곳이자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인간들의 삶의 터전. 걸인, 노숙자, 기독교 광신도, 몸 파는 창녀와 남창, 상경객을 노리는 사기꾼, 가출한 십대들, 호객꾼들과 소매치기가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곳. 바로 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확히는 화장실에서 주인공 제이는 태어난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동원된 두 가지 사건. “종말론자들도 터미널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의 예언자가 받았다는 계시에 따르면 1992년 10월 28일이 휴거일이었다.”와 “대합실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이는 바로 이런 시공간적 배경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고속버스터미널과 휴거와 한중수교와 제이. 사실 여기에 소설의 큰 맥―제이를 비롯하여 소설 속 일탈청소년들을 만들어낸 배경―이 담겨있다고 본다. 이런 걸 발견하는 게 김영하 소설을 읽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도 이런 설정/장치들을 발견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지만, 그 재미를 덮어버리는 의문점이 있었는데, 
 
이 소설, 뭔가 잉여스럽다,는 생각. 가장 이상한 건 시점문제. 주인공은 제이. 소설 속 화자는 1장부터 3장까지는 동규, 4장과 에필로그 부분은 작가지만 4장은 승태가 주인공 시점을 가지고 있다. 의문―굳이 이렇게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승태가 꼭 등장해야할 필요가 있었나? 없어도 전혀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왜 동규를 화자로 삼았을까? 어차피 2장은 동규 없이 진행되는 제이의 이야기이고, 1장을 제외하면 소설 내내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서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 말이다. 시점을 섞어서 얻은 긍정적 효과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발 더 나아가 다음의 질문도 가능. 
왜 동규란 인물을 만들어냈을까? 동규가 이 소설에서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동규라는 존재가 뭔가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동규가 겪는 ‘함구증’이나 가정의 불화 같은 부분이 잘 해석되지 않는다. 그나마 동규의 존재이유를 찾는다면 성경에서 유다의 역할로서 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글쎄, 나는 제이의 죽음을 바라는 동규의 모습이 생뚱맞게 보였다. 많이 억지스러워 보였다.

*****
위의 의문들 말고도 답답한 부분들은 많다. 두 번을 읽었건만 내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직도 암호투성이의 편지처럼 느껴진다. 세 번 읽으면 달라지려나? 하지만 어쨌든 확인하게 된 사실. 김영하의 새 장편이 향한 곳은 ‘비행’청소년의 공간이었다. 또 한가지 사실 주인공의 나이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고, 소설이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있다. 김영하 소설의 다음은 언제일까, 그리고 누구의 이야기일까. 기대감은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 다음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나오는 대사 하나. “가끔은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른 것이 도착하는데 실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을 거야. 바로 너처럼.” 글쎄, 이번 건 내가 기다리던 거랑 진짜 전혀 다른 게 왔는데 이게 내가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던 건 (확실히) 아닌 듯싶고, 다음은 어떻게 될는지. 그리고 그걸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이 소설을 더 읽게 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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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서 2012/03/05 09:46

저녁 6시 중천의 상현달


*
삼일절날. 후배 하나 밥 사주려고 저녁에 만났다. 식당가를 돌아다니다가 밥 먹기 전에 담배 하나 피자 싶어 골목 구석으로 들어가면서 무심코 하늘을 봤는데 어랍쇼, 달이 중천에 떠 있었다. 6시 즈음이었다. 후배에게 말했다. 
“야, 무슨 달이 벌써 중천에 떠 있냐?” 
공학사인 나보다 과학을 많이 아는 후배놈이 대답했다. 
“형, 상현달은 원래 이 시간에 달이 중천에 가 있어요. 보름달은 자정에, 하현달은 새벽에 있구요.” 
“그래? 신기한데. 근데 왜 그런거야?” 
“그거 다 고등학교 지구과학에 나오는 내용이잖아요. 상식이에요. 달의 공전과 지구의 자전 뭐 등등.” 
“지구과학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아마 그때는 알았는데 까먹었나 보다.”
담배를 나눠 피고 밥을 먹었다.
후배랑 헤어진 후 집으로 오는데 계속 그 달이 생각났다. 
저녁 6시에 중천에 떠있던 상현달.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항상 스스로를 어린 나이라고 생각해왔다. 아직 인생의 황금기가 오지 않았다고 믿었고, 보여준 것보다 보여줄 것이 많은, 가진 것보다 가질 것이 많은 상태라고 여겼다.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면서도 지금은 준비기, 태동기라며 스스로를 위로했고, 미성숙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앞으로 더 발전될 미래를 생각하며 기대를 품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 6시 중천에 떠 있던 달을 본 이후 달을 쳐다볼 때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중천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과 슬픔이 몰려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말하길 마흔, 쉰에 인생의 정점을 찍는다지만 그건 보름달 인생들의 이야기일 뿐, 내 인생도 그들처럼 보름달일 거라는 증거는 없다. 내 것은 상현달이어서 남은 내 인생이 앞으로 떨어질 일 밖에 없는 것이지는 않을까?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지금 요모양, 요꼴이라면 이건 너무 억울한 일 아닌가? 혹시나 초승달 인생이어서 이미 오래전에 인생의 정점을 찍은 후 이제는 쇠락의 궤도에 올라 남은 것은 템포를 맞추며 연착륙하는 일뿐이라면 이를 어쩌나, 서글퍼서 어쩌나.

***
이번 주에 만31세가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하릴없이 나이만 먹는다는 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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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에서 시작해서 <쇼걸>로 끝난 리뷰



블랙스완 (2011)

Black Swan 
8.3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나탈리 포트만, 밀라 쿠니스, 뱅상 카셀, 바바라 허쉬, 위노나 라이더
정보
스릴러 | 미국 | 108 분 | 2011-02-24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을 보았다. 


*
영화든 소설이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걸 보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19살 풋풋한 새내기 때 읽은 <상실의 시대>와 서른 즈음에 읽은 <상실의 시대>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듯 말이다. 세간의 평이 좋은 <블랙 스완>을 보고 난 후 만약 내가 다른 상황에서 이 영화를 봤으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특별했다는 말이다. 
좀 길게 서술하자면, 나는 2주전에 <스틸 라이프>를 보고 다시 10대 시네마키드로 돌아간 심정으로 정성일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읽었다. 그 다음 거의 일주일에 거쳐 <율리시즈의 시선>을 보았고, (틈틈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을 읽었다.) 수해로 날려버린 줄 알았던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를 처음 보듯 다시 읽기 시작했다. <블랙 스완>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영화의 이해』 의 1장과 2장, 즉 촬영과 미장센에 대한 부분까지 읽은 후였다. 당연히 영화 내내 촬영과 미장센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며 보았고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우연인지, 필연인지) TV를 돌리다 폴 버호벤의 <쇼걸>에 오랫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난 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상 배경설명 끝.

**
<블랙 스완>에 대한 설명. 
1)일단 낯익은 설정. 자기를 던져서야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내용은 <인어공주>에서부터 들어왔던 거고, 예술작품이 혹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예술가를 파멸시키는 내용 역시 익숙한 스토리. <서편제>가 그랬고, 반대된 구조지만 <파리넬리>도 비슷한 이야기며, <아마데우스>도, 물론 주된 것은 모차르트(혹은 신)을 질투하는 살리에르(혹은 인간)의 이야기지만,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다 죽어가는 설정 그 자체는 이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 내용 자체의 충격은 덜한 편. 발레 밖 니나가 발레 속에서 맡은 역할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발레에 성공할수록), 니나의 운명 역시도 발레 속 주인공의 운명과 같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고, 그녀를 억압하는 기제들이 사실은 그녀 스스로 만든 것임을 관객으로서 일치감치 알아차리는 순간 준비된 반전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물론 이건 충분히 반박이 가능한데 사실 니나에게 작용하는 억압기제는 의인화(엄마, 감독, 선배, 라이벌 등)되어 실재하기 때문이다. 즉, 문제의 본질은 내부보다 외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판결은 이쪽에 가깝다.

2)서사적이라기보다 정서적인 영화. 영화 내내 롱 쇼트나 풀 쇼트가 거의 없고, 대부분 클로즈업 과 오버 더 숄더 쇼트―미디엄 쇼트로 구성되어 있다. 몇몇 발레장면에서만 롱 쇼트. 특별한 기교는 없었고, 두어 번 점프 컷은 생략 말고는 의미를 찾기 힘들며, CG장면은 요즘 영화답지 않게 어색했다. 발레를 다룬 영화라서 자연스러운 발레슈즈 클로즈업은 주인공 니나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현실에서의 처지를 표현해주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슬로모션으로 처리되는 장면도 이 발레슈즈 클로즈업 쇼트다. 발레라는 장르자체가 중요한 설정이기에 발레장면을 연출하는데 공을 들인 듯한데, 발레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내가 몰입될 정도로 잘 만들었다. 특히 프롤로그. 그 씬이 영화 전체에서 제일 좋았다. 색은 화이트 스완, 블랙 스완에서 알 수 있듯이 흑백의 대비. 인형, 오르골 등 ‘마이 스위트 걸’로 길러진 니나를 알려주는 몇몇 소도구들이 등장하지만 인상적인 건 딱히 없다. 영화를 가득 채우는 도구는 거울인데, 이 역시 발레가 주는 특성인 동시에 니나가 받는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실상은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며, 계속해서 분열해나가는 니나의 자아, 그 심리상태를 표현한다. 따라서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근에서 니나가 거울을 깨부수고서야 갈등이 해결되는 상황은 절묘하다. <블랙 스완>은 쉬운 도식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니나는 의외로 영화 내내 프레임 내에서 고립되지 않으며 앵글은 90% 이상 아이 레벨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억압적인 구도를 자아내기 쉬운 장면에서도 ‘인위적’이라는 함정을 피해나간다. 마치 중요한 건 외부의 시각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3)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듯. 이게 앞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이라고 한 이유. 나탈리 포트만이란 배우야 말로 화이트/블랙 스완이구나 싶었다. 하여튼 재미있는 영화이긴 한데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전달될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억지에 억지를 부리자면 뭐,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이중성을 요구받는 사회인 일반에 대한 비유, 혹은 각종 사회적 억압(especially sex)과 주체적 자아 간 갈등관계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듯한데, 이건 좀 많이 억지다 싶다. 결론은, 2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하지만 다시 찾아보게끔 만들진 않는 영화, 되시겠다. 이상 끝.

***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TV를 돌리다 우연히 <쇼걸>을 보면서, 일차적으로 두 영화가 닮았다는 생각. 사실 차이점이 발레와 스트립쇼만큼 있지만 말이다. 이차적으로 든 생각은, 요게 핵심인데, 이 영화 굉장히 잘 만든 거였구나, 라는 생각. 적어도 촬영과 미장센이라는 부분에서는 <쇼걸>이 <블랙 스완>보다 낫다고 판정을 내렸는데, 쇼트를 나누는 것도 그렇고, 역학관계를 알려주는 앵글과 구도, 하다못해 거울을 다루는 솜씨까지 예전에 봤을 땐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장님 눈뜬 것처럼 보이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


32초짜리 이 씬은 한 개 쇼트로 되어 있고 좌우로 약간 팬(pan)된다. 내용상 중요한 것을 담고 있지 않은, 사실 통째로 싹둑, 날려도 전혀 상관없는 씬처럼 보인다. 내가 놀란 건, 이 씬에서 대사를 치는 인물들이 프레임에서 차지하는 위치다. 대사를 치는 6명이 놀랍게도 정확하게 프레임 중간을 차지한다. 각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말이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처럼 대사에 따라 쇼트를 나눈다면 어떨까? 아마 분장실 특유의 부산스러움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입구를 열어놓아 공간을 확장시켰고, 정돈되지 않은 옷가지, 소품 등으로 무대를 혼란스럽게 세팅해놓았다. 씬의 시작을 알리는 듯 분장실 입구를 드나드는 배우들, 색색(빨강, 보라, 무지개, 흰색 등) 옷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풍부함, 그리고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로 이 공간을 정말 실제의 스트립쇼 분장실처럼 연출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걸 완성한 건 쇼트를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찍는 것. 한방에 처리함으로써 쇼트를 나눴을 때 사라질 운동성, 활력을 보존한 것이다. 그걸 이 씬이 해냈다. 요걸 발견하고 감탄했으며, 어쩌면 잉여에 다름없는 장면을 감독이 살린 이유가 혹시 자기의 잘난 솜씨를 뽐내려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씬 말고도 영화 곳곳에 놀라운 연출들이 숨어 있었는데, 그걸 다 이야기하려면 TV영화로 봐서는 한계가 있고 DVD로 다시 요놈을 정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 버호벤, 왜 명감독이라고 하는 줄 알겠다. 이상은,
<블랙 스완>으로 시작해서 <쇼걸>로 끝난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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