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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4/26 17:05

밋밋하고 어설픈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2012)

Nameless Gangster : Rules of Time 
8.1
감독
윤종빈
출연
최민식, 하정우, 조진웅, 마동석, 곽도원
정보
범죄, 드라마 | 한국 | 133 분 | 201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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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native로서 도저히 들어줄 수 없는 사투리. 

<좋은 친구들>과 <대부>를 짜깁기 한 것 같은 영상/내용. 

아무리 장르적 관습이라지만 너무 뻔한 결말과 메시지. 

8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질감과 눈에 띄는 몇몇 캐릭터를 제외하면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아까운 영화.

주제넘은 말이지만, 

윤종빈이란 감독은 좋은 소재에 비해 너무 밋밋하고 어설픈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근데 그걸 또 나는 다 봤네?





영화 2012/03/02 05:09

<블랙 스완>에서 시작해서 <쇼걸>로 끝난 리뷰



블랙스완 (2011)

Black Swan 
8.3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
출연
나탈리 포트만, 밀라 쿠니스, 뱅상 카셀, 바바라 허쉬, 위노나 라이더
정보
스릴러 | 미국 | 108 분 | 2011-02-24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을 보았다. 


*
영화든 소설이든 언제, 어디서, 어떻게 그걸 보았느냐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19살 풋풋한 새내기 때 읽은 <상실의 시대>와 서른 즈음에 읽은 <상실의 시대> 사이에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듯 말이다. 세간의 평이 좋은 <블랙 스완>을 보고 난 후 만약 내가 다른 상황에서 이 영화를 봤으면 어쨌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이 특별했다는 말이다. 
좀 길게 서술하자면, 나는 2주전에 <스틸 라이프>를 보고 다시 10대 시네마키드로 돌아간 심정으로 정성일의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를 읽었다. 그 다음 거의 일주일에 거쳐 <율리시즈의 시선>을 보았고, (틈틈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을 읽었다.) 수해로 날려버린 줄 알았던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를 처음 보듯 다시 읽기 시작했다. <블랙 스완>을 보게 되었을 때에는 『영화의 이해』 의 1장과 2장, 즉 촬영과 미장센에 대한 부분까지 읽은 후였다. 당연히 영화 내내 촬영과 미장센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며 보았고 어느 때보다 꼼꼼하게 보았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우연인지, 필연인지) TV를 돌리다 폴 버호벤의 <쇼걸>에 오랫동안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난 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상 배경설명 끝.

**
<블랙 스완>에 대한 설명. 
1)일단 낯익은 설정. 자기를 던져서야 목적한 바를 이룬다는 내용은 <인어공주>에서부터 들어왔던 거고, 예술작품이 혹은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예술가를 파멸시키는 내용 역시 익숙한 스토리. <서편제>가 그랬고, 반대된 구조지만 <파리넬리>도 비슷한 이야기며, <아마데우스>도, 물론 주된 것은 모차르트(혹은 신)을 질투하는 살리에르(혹은 인간)의 이야기지만, 모차르트가 레퀴엠을 작곡하다 죽어가는 설정 그 자체는 이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 내용 자체의 충격은 덜한 편. 발레 밖 니나가 발레 속에서 맡은 역할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발레에 성공할수록), 니나의 운명 역시도 발레 속 주인공의 운명과 같을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하고, 그녀를 억압하는 기제들이 사실은 그녀 스스로 만든 것임을 관객으로서 일치감치 알아차리는 순간 준비된 반전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물론 이건 충분히 반박이 가능한데 사실 니나에게 작용하는 억압기제는 의인화(엄마, 감독, 선배, 라이벌 등)되어 실재하기 때문이다. 즉, 문제의 본질은 내부보다 외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판결은 이쪽에 가깝다.

2)서사적이라기보다 정서적인 영화. 영화 내내 롱 쇼트나 풀 쇼트가 거의 없고, 대부분 클로즈업 과 오버 더 숄더 쇼트―미디엄 쇼트로 구성되어 있다. 몇몇 발레장면에서만 롱 쇼트. 특별한 기교는 없었고, 두어 번 점프 컷은 생략 말고는 의미를 찾기 힘들며, CG장면은 요즘 영화답지 않게 어색했다. 발레를 다룬 영화라서 자연스러운 발레슈즈 클로즈업은 주인공 니나의 불안한 심리상태와 현실에서의 처지를 표현해주는데 (내 기억이 맞다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슬로모션으로 처리되는 장면도 이 발레슈즈 클로즈업 쇼트다. 발레라는 장르자체가 중요한 설정이기에 발레장면을 연출하는데 공을 들인 듯한데, 발레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내가 몰입될 정도로 잘 만들었다. 특히 프롤로그. 그 씬이 영화 전체에서 제일 좋았다. 색은 화이트 스완, 블랙 스완에서 알 수 있듯이 흑백의 대비. 인형, 오르골 등 ‘마이 스위트 걸’로 길러진 니나를 알려주는 몇몇 소도구들이 등장하지만 인상적인 건 딱히 없다. 영화를 가득 채우는 도구는 거울인데, 이 역시 발레가 주는 특성인 동시에 니나가 받는 외부로부터의 억압이 실상은 자기 스스로의 문제라는 것을 암시하며, 계속해서 분열해나가는 니나의 자아, 그 심리상태를 표현한다. 따라서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근에서 니나가 거울을 깨부수고서야 갈등이 해결되는 상황은 절묘하다. <블랙 스완>은 쉬운 도식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니나는 의외로 영화 내내 프레임 내에서 고립되지 않으며 앵글은 90% 이상 아이 레벨 쇼트를 사용함으로써 억압적인 구도를 자아내기 쉬운 장면에서도 ‘인위적’이라는 함정을 피해나간다. 마치 중요한 건 외부의 시각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3)나탈리 포트만의 연기가 영화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듯. 이게 앞에서 ‘나탈리 포트만’의 <블랙 스완>이라고 한 이유. 나탈리 포트만이란 배우야 말로 화이트/블랙 스완이구나 싶었다. 하여튼 재미있는 영화이긴 한데 영화에 담긴 메시지가 스크린을 넘어 관객에게 전달될만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억지에 억지를 부리자면 뭐, 현대사회를 살아가며 이중성을 요구받는 사회인 일반에 대한 비유, 혹은 각종 사회적 억압(especially sex)과 주체적 자아 간 갈등관계 정도로 말할 수 있을 듯한데, 이건 좀 많이 억지다 싶다. 결론은, 2시간이 아깝지 않은 영화, 하지만 다시 찾아보게끔 만들진 않는 영화, 되시겠다. 이상 끝.

***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TV를 돌리다 우연히 <쇼걸>을 보면서, 일차적으로 두 영화가 닮았다는 생각. 사실 차이점이 발레와 스트립쇼만큼 있지만 말이다. 이차적으로 든 생각은, 요게 핵심인데, 이 영화 굉장히 잘 만든 거였구나, 라는 생각. 적어도 촬영과 미장센이라는 부분에서는 <쇼걸>이 <블랙 스완>보다 낫다고 판정을 내렸는데, 쇼트를 나누는 것도 그렇고, 역학관계를 알려주는 앵글과 구도, 하다못해 거울을 다루는 솜씨까지 예전에 봤을 땐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것들이 장님 눈뜬 것처럼 보이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장면.


32초짜리 이 씬은 한 개 쇼트로 되어 있고 좌우로 약간 팬(pan)된다. 내용상 중요한 것을 담고 있지 않은, 사실 통째로 싹둑, 날려도 전혀 상관없는 씬처럼 보인다. 내가 놀란 건, 이 씬에서 대사를 치는 인물들이 프레임에서 차지하는 위치다. 대사를 치는 6명이 놀랍게도 정확하게 프레임 중간을 차지한다. 각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말이다. 만약 일반적인 경우처럼 대사에 따라 쇼트를 나눈다면 어떨까? 아마 분장실 특유의 부산스러움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감독은 입구를 열어놓아 공간을 확장시켰고, 정돈되지 않은 옷가지, 소품 등으로 무대를 혼란스럽게 세팅해놓았다. 씬의 시작을 알리는 듯 분장실 입구를 드나드는 배우들, 색색(빨강, 보라, 무지개, 흰색 등) 옷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풍부함, 그리고 끊길 듯 이어지는 대화로 이 공간을 정말 실제의 스트립쇼 분장실처럼 연출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걸 완성한 건 쇼트를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찍는 것. 한방에 처리함으로써 쇼트를 나눴을 때 사라질 운동성, 활력을 보존한 것이다. 그걸 이 씬이 해냈다. 요걸 발견하고 감탄했으며, 어쩌면 잉여에 다름없는 장면을 감독이 살린 이유가 혹시 자기의 잘난 솜씨를 뽐내려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 씬 말고도 영화 곳곳에 놀라운 연출들이 숨어 있었는데, 그걸 다 이야기하려면 TV영화로 봐서는 한계가 있고 DVD로 다시 요놈을 정독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폴 버호벤, 왜 명감독이라고 하는 줄 알겠다. 이상은,
<블랙 스완>으로 시작해서 <쇼걸>로 끝난 리뷰.


 


영화 2012/02/28 21:53

과연, 감히, 희망할 수, 있겠는가



율리시즈의 시선

The Gaze of Odysseus 
10
감독
테오도로스 앙겔로풀로스
출연
하비 키이텔, 얼랜드 조셉슨, 마이아 모겐스턴, 타나시스 벤고스, 반겔리스 카잔
정보
전쟁, 드라마 |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영국,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알바니아, 루마니아 | 176 분 | -



*

먼저 『오디세이아』부터;
읽은 지 너무 오래돼서 구체적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중심테마는 ‘영웅의 귀환’. 그리고 평화의 회복. 하지만 정작 인상적인 건 오디세이의 여성편력. 애초에 오디세우스가 트로이전쟁에 참가하게 된 원인은 절세미녀 헬레나. 풍랑 속에서 자신을 ‘거둬 준 죄’로 더 큰 상처를 얻는 칼립소, 세이렌 등 ‘마녀들’. 그리고 20년 동안 수절하고 있는 남자들의 이상 페넬로페. 하여 이것은 홍상수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처럼 수컷들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담은 작품. 그러나 여전히 소설, 영화에서 각종 모티브로 활용되는 훌륭한 도구. 

**
이제 <율리시즈의 시선>;
오랜 미국 망명을 마치고 고향 그리스로 돌아온 주인공(하비 케이틀). 그의 목적은 행방이 묘연한 그리스 최초의 영화(발칸 반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 지역의 역사와 관습을 담았다고만 전해지는 마나키아 형제의 미현상 필름)을 찾는 것. 그리스에서, 알바니아로, 베오그라드에서 사라예보로 수소문해서 필름을 찾아 헤매는 주인공. 과거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그는 계속해서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꿈으로, 환상 속으로 가라앉고, 그런 그를 더욱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현실에서 마주하는 잔인한 내전의 풍경. 결국 가장 격렬한 내전의 현장에서 찾게 된 마나키아 형제의 필름. 하지만, 하지만…….

***
소비에트의 몰락과 연이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의 결과는 처참했다. 특히나 여러 민족들이 섞여 만든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세르비아계에 의한 복수라는 이름의 학살이 뒤따랐다. 이 비극적 현실은 너무나 엄중하였기에 거의 실시간으로 문학으로, 영화로 다루어졌다. 95년에 나온 <율리시즈의 시선>도 그런 영화다. 발칸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영화의 절대적 요소로 된다. 확실히 이 영화는 처절한 울림을 담고 있다. 마지막 ‘안개 속의 학살’ 시퀀스에 이르러선 그 누구도 마음 편히 영화를 감상할 수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쿠스트리차의 <언더 그라운드>가, 그 정치적 위험성은 차치하고서, 어쨌든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지금보다 나은 희망의 미래를 보여주려 한다면, 이 <율리시즈의 시선>은 영화 곳곳의 환상 속에서마저 우리를 무릎 꿇게 만든다. 돌아온 율리시즈의 시선이 닫는 곳; 넓은 눈밭에 나무처럼 꽂힌 듯 서 있는 사람들.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어찌 하나같이 울음을 머금고 있는 절망적인 표정들. 테오 감독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 폭격으로 인해 붕괴 일보 직전인 캄캄한 극장 안에서 우리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과연, 감히, 희망할 수, 있겠는가,

****
영화 속 가장 인상적인 한 장면. <율리시즈의 시선>에서 가장 빠른 흐름. 
 


파괴된 동상. 현실 사회주의의 창시자. 이제는 타국으로 흘러가는 그에게 민초들이 보내는,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은 마지막 인사. 체제의 몰락이 부른 비극. 이질적 집단을 통일시켰던 이념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를 메꾼 것은 무엇이었나. 진보라는 개념을 부정하게 만드는 내전이 끝난 후 그 자리를 차지한 건 피 묻은 돈의 향연. 백지상태였기에 가장 철저하게 전파된 신자유주의 시스템과 인신매매, 밀수, 마약, 갱 조직 등 깡패 자본주의. 어쩌면 내전은 한 시대의 대단원이 아니라 새 시대의 전초전이 아니었을까. 97년, IMF가 우리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
영화는 지겹고 또 지겨울 정도로 느리다. 앙겔로풀로스 작품임을 감안하고 마음의 다짐을 하고봐도 느리다. 곳곳에 현실과 환상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특유의 선문답 같은 물음들이 넘쳐나 집중, 또 집중해야 한다. 『오디세이아』에서처럼 네 명의 여자들이, 그것도 1인 4역으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솔직히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피로감이 장난 아니다. 그래도 확실히 잘 만든 ‘영화’임은 분명하다. 그건 영화 초반 이 한 장면만 봐도 검증된다. 참고로 이게 한 쇼트다. 
 



******
앙겔로풀로스를 보고 나니 쿠스트리차 영화가 다시 보고 싶어졌다. 시간은 없는데 볼 게 너무 많다. 






 


영화 2012/02/20 13:24

내가 지금 굉장한 걸 보고 있다!



스틸 라이프 (2007)

Still Life 
8
감독
지아 장커
출연
자오 타오, 한 산밍, 왕굉위, 황용
정보
드라마 | 중국, 홍콩 | 112 분 | 2007-06-14



문학이든 영화든 어떤 작품을 읽고 이것이 ‘좋은 것’임을 알아차리는 타이밍. 

①책을 다 읽고 덮을 때 혹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와” 하는 감탄사가 나오는 경우. 예로는 『태백산맥』(“대장님, 우리는 아직 심이 남아 있구만요.”), <안개 속의 풍경>(나무, 그 나무) 등등. 
②처음 봤을 때는 별로네 싶다가 2~3년 지난 다음에 다시 읽었을 때 “아, 왜 내가 이걸 제대로 몰랐지?” 하는 경우. 10년 만에 다시 읽고서 한동안 일을 손에 잡지 못하고 멍해 있었던 『상실의 시대』나 <대부> 같은 걸작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③보면서 ‘내가 지금 굉장한 걸 보고 있다!’는 생각이 바로 드는 경우. 이 경우엔 감상과 동시에 전율이 찾아오는데 내 경우 계간지 창비에 실린 『꽃 같은 시절』 part 1을 읽었을 때나, 캄캄한 비디오방에서 <올드보이>의 오프닝을 봤을 때, 뭐 이정도가 있겠다.


주말에 <스틸 라이프>를 봤다. ③에 해당하는 놈이었다. 타이틀이 올라갈 때쯤부터 “요거 굉장한 놈인데?”라는 생각이 들더니 마지막 즈음엔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거의 죽었다.” 최근에 본 영화들 중에서 최고다. 압도적 최고다. 보고나서 다시 한 번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영화에 대한 해설은 정성일과 지아장커의 대담(『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에 수록)에 거의 다 담겨 있다. 아래 인용은 모두 거기에서 Ctrl+C, Ctrl+V한 지아장커의 말.

그러니까 <삼협호인>의 영어 제목인 ‘Still Life’는 중국어로 ‘靜物人生’입니다(‘고요한 삶’이 아닙니다). 중국 사람들에게 담배, 술, 차, 사탕은 가장 중요한 네 가지입니다. 그 네 가지만 있으면 가정 생활이 행복해진다고 말합니다. 나는 이 네 가지 물질을 통해서 삶의 순간을 멈춰 세운 다음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행복하십니까?


*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 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인물들이 아니라 배경으로 나온 산샤라는 생각. 한쪽에서는 산수화 같은 풍경이 펼쳐지고 그 밑으론 끊임없이 철거, 공사가 진행되고 건물이 들어서는 공간. 딱 봐도 현대 중국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 산샤라는 공간을 지아장커라는 감독은 그야말로 환상적으로 다뤘다. 인물들이 프레임에서 사라져도 여전히 남는 이 풍경의 영상은 적막하지만 어떤 소리 높은 발언보다 정치적으로 느껴진다. 인물을 압도하는 공간! 그런데, 
보다 보니 그게 아니다. 점점 그 압도적 풍경보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노동하는 사람들이 가슴에 맺힌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돌 깨는 소리. 벗은 웃통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땀방울. 기계처럼 반복되는 망치질. 조그마한 체구, 순박한 외모의 노동자들. 영화 내내 내 가슴을 짓뭉개는 것은 절경 속에서 부서지고 세워지는 건물들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 땀 흘리며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그게 사실 영화의 핵심이었다. 다음은 자이징커의 말.

나는 이 영화에서 (부서져 가는 도시의) 풍경보다도 노동하는 사람들의 몸, 그 몸에 흐르는 땀을 보았습니다. 예전에는 사회적인 자리에서 사람을 보았다면 이제는 나는 그것을 생명이라는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게 나의 가장 큰 변화입니다. 이전에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이런 사회는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지금은 이런 사회에서도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서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

생각 둘. 왠지 모르게 이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혀 다른 영화다. 롱테이크를 많이 사용했다는 점, 주인공들이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는 점, 축축한 습기가 화면을 넘어 전달된다는 점 등 비슷한 점은 많지만(생각해보니 많은데?) 그래도 <스틸 라이프>는 영화의 발언의 성격, 기초하고 있는 토대, 이야기의 구조가 전혀 다른 영화다. 하지만 보는 내내 <안개 속의 풍경>이 생각났다. 급기야 아래 장면을 볼 때는 ‘이건 혹시 오마쥬?’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다.



***

생각 셋. UFO, 건물로켓, 외줄타기. 이 CG들의 목적은 뭘까? 영화에서 세 번 뜬금없이 등장하는 이 초현실주의같은 장면들을 보고 ‘이게 뭐야’ 싶었다. ‘왜 흐름을 깨지?’ 이런 생각도 들었고.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반대로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과연 어느 게 더 초현실적인 일일까? 산수화 같은 자연 아래 끊임없이 철거와 건설이 진행되는 장소 vs UFO. 기계처럼 끊임없이 망치질하는 노동자 vs 건물로켓. 돈을 주고 산 아내/결혼했지만 다른 도시에 사는 부부 vs 고공외줄타기. 감히 전자보다 후자가 더 초현실적이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두 주인공 중 한 명인 한산밍은 나의 이종사촌 형입니다. 그는 고향에서 실제로 광부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미 <플랫폼>과 <세계>에서도 광부로 나온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광산촌은 너무 힘들기 때문에 광부는 대부분 혼자 살고 있고, 그래서 돈을 주고 사는 수가 많습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셴홍은 남편을 찾으러 이곳에 찾아옵니다. 결혼했지만 서로 다른 도시에서 헤어져 살고 있는 부부들은 언젠가 결정을 해야 할 일과 마주칩니다. 지금 이런 일이 중국에서 매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
<스틸 라이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이란 다큐영화도 같이 봐야한단다. <스틸 라이프>도 다큐feel이 강했는데 아예 다큐라니. 조만간 찾아 봐야겠다. 마지막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지아장커의 말 두 개.

예술가 혹은 지식인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억압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엄살을 부리는 것입니다. 힘들어, 라고 말하지만 사실 현실의 무게 아래에서 그걸 다 들고 서서 버티며 진정 힘든 것은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현실은 험난하고, 그 현실을 떠받치고 현실에서 살아가는 것은 엄청난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민, 그들의 힘이 이 힘겨운 세상의 현실을 떠메고 온몸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중국에서는 질문을 바꾸어야 합니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근대화, 자본주의화, 세계화, 그 안에서 사람의 중요성은 점점 더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중국 영화가 중국을 찍기 위해서 질문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지금 시급합니다. <삼협호인>은 그것을 하소연하는 영화입니다.




영화 2012/02/19 00:39

이게 뭐야, 안 볼란다 나는



행복 (2007)

Happiness 
7.3
감독
허진호
출연
황정민, 임수정, 김기천, 유승목, 이재훈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121 분 | 2007-10-03



1. 
OME! 시작하고 한동안 쏟아낸 탄식들. 아. 뭐지 이 작가미상의 영화는? 이게 허진호 영화인가? 왜 이렇게 변한건지, 쇼트가 뭐 이리 많아? 가슴을 후벼 들어오던 그 느린 호흡은 어디 간 거지? 장면 장면 캡처와 동시에 훌륭한 그림이 됐던 그 영상은 온데간데없고(이건 그래도 뭐 이해할 수 있어), 숱하게 보아왔던 어정쩡한 영화가 왜 내 눈 앞에 있는거야? 아.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 누가 허진호를 변하라고 한 거지? 왜 변신에 안달난거야? 왜, 왜, 왜. 
그렇게 30분쯤 지났나. 드디어 허진호스러운 장면들이 좀 나오더군. 가령,
 


라던지,
 


같은거. 이런 게 허진호다운 거잖아. 근데, 이게 영화 끝까지 이어지지 않더군. 제일 불만인 게 뭐 그리 잘게 잘라났어? 그리고 왜 그리 급하게 넘어가? 휴우-하고 느낄라 치면 툭툭, 샥샥. 이거이거, 참. 어쨌든 실망.

2.
내가 멜로물을 볼 때 보는 건 이런거야. 어차피 멜로물은 다 정석 같은 게 있잖아. 먼저 어떻게 서로에게 빠져드는가. 두 번째로 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흔히 섹스). 세 번째로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위기. 마지막으로 그 위기의 극복. 요렇게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멜로물들은 거의 99% 이 정석대로 흘러간다고. 이 지겹고 익숙한 스토리를 하나의 작품으로 만날 때 내가 생각하는 건 이런 정석대로의 흐름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그리고 매 단계에서 얼마나 참신하게 그것을 다루는가, 독자/관객의 이해를 구하려고 억지를 부리진 않는가, 어떻게 하나의 단계를 뒤틀어놓아 사람들을 환기시키는가, 혹은 하나하나에 얼마나 사회적, 정치적 의미를 투영하는가, 뭐 그런거야. (물론 제일 중요한 건 이게 내 가슴을 얼마나 울리는가 하는 거지만 누구 말처럼 장례식장에서 흘리는 눈물의 절반은 자기의 설움이라고 그건 어차피 개인의 경험에 달린 문제니 나처럼 찐따같이 사는 놈은 어지간한 러브러브스토리엔 가슴이 흐물흐물해진다고.)
가령,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보자고. 이건 전형적인 멜로물의 형식을 따르면서 위의 네 단계 중에 세 번째를 극화(極化)하지. 중년의 백인여성이 모로코 출신의 젊은 이방인과 사랑을 하면서 발생하는 위기, 특히 사회하층에 속한 독일여성이 주변의 배타적 시선에 두려움을 느껴 스무살 어린 연인을 외부로 쫓아내는 장면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파시즘의 향기를 다시 맡게 되는거야. 이건 이주노동자 문제로 사회혼란이 펼쳐지는 유럽사회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거라고. 그렇게 영화는 정치적이 되는거지. 멜로/로맨스/애정으로 분류된 이 영화에서 말이야. 또 다른 예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란 영화. 사실 나는 이 영화 별로라고 생각하지만 딱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있어. 그건 이 영화에서 세 번째 단계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다는 거야. 보호자도 없는 장애여성과의 사랑이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는 걸 누구나 알잖아. 영화는 이걸 퉁 쳐내면서 각자에게 상상의 책임을 넘겨버려. 그리고 바로 네 번째로 넘어가는 거지. 그게 바로 이 ‘보잘 것 없는’ 영화를 그래도 많은 영화인들이 추천영화에 넣는 이유라고 생각해 나는 말이지.
 
본론으로,
<봄날은 간다>는 적어도 이런 네 단계 구성에 있어서 적어도 나에겐 완벽한 영화였다고. 털이 쭈뼛쭈뼛 설 정도였어. 아직도 다시 보면 감탄사가 나오는 영화라고. 첫 번째 단계, 상우랑 은수가 서로에게 호감을 얻게 되는 과정을 보자고.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 눈 내리는 고요한 사찰 풍경 소리. 대사 한 마디 없이 서로에게 빠져드는 걸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고. 두 번째 단계는 그 유명한 “라면 먹고 갈래요?” 세 번째는 더 유명한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이렇게 파고들다 네 번째 단계에서 화룡점정을 찍는 장면이 이런 거였잖아.
 


이렇게 참신하고, 기깔나고, 스타일리쉬한 멜로물을 보지 못했어. <봄날은 간다>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근데 <행복>은 뭐야. 무색무취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영수(황정민)를 떠나보내는 은희(임수정) 시퀀스로 잡은 거 같은데 그거 별로였어. 은희가 달리다 쓰러지는 장면은 애절하기보다 억지스러웠다고. 집을 나가는 영수를 카메라로 잡고 사운드로 은희의 울음소리를 내보내는 건 촌스러웠고 말이야. 그나마 1, 2단계는 봐줄만 했어. 제일 별로였던건 4단계야. 굳이 다시 만나야 돼? 영수는 폐인이 되어야 돼? 너무 전형적이였어, 너무. 그냥 퉁 쳐내버리는 게 나았을 거 같다고.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죽은 한석규의 장례식에 심은하가 찾아가지 않은 것처럼 말이야. 
이런 내용적인 거보다 더 실망스러웠던 건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스타일이 사라진거야. 쇼트의 난사(물론 상대적으로), 짧은 호흡(이것도 물론 상대적으로). 난 빠져들고 싶다고. 좀 천천히 물에 몸을 적시고 싶다는 말이야. 근데 그러지 못했어. 짐 캐리의 코메디를 기대하고 본 영화가 <이터널 선샤인>이었던 날 만큼 실망스러웠어. 사실, 변신? 그런 거 필요없어. 잘하는 거만 해. 이나영한테 바라는 것도 그런거야. 그냥,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는 거만 하라고. 4차원 연기. 로버트 드 니로도, 알 파치노도 하나의 이미지를 먹고 산다고. 테오 앙겔로풀로스와 쿠엔틴 타란티노가 믹스되길 원하는 사람은 없잖아. 그런 거란 말이야. 허진호 감독이 혹시라도 변신하고 싶으면 말이지, 멜로 말고 다른 장르에 도전해봐. 괜한 스타일을 변신시키지 말고 말이야. 어제 <스틸 라이프>를 보다 잤는데 이런 장르도 어울릴 것 같다고.

3.
얼마 안 있어 <호우시절>을 볼 생각인데, 아, 제발. 내가 만나고 싶은 허진호가 거기 있었으면 좋겠어. 제발 말이야.








행복, 허진호
영화 2012/02/17 12:44

예정된 패배―사랑과 기억과의 투쟁



동사서독 (1995)

Ashes Of Time 
8.9
감독
왕가위
출연
장국영, 양가휘, 임청하, 양조위, 장학우
정보
액션, 무협 | 홍콩, 대만, 중국 | 100 분 | 1995-11-18



왕가위의 영화를 두고 정성일을 말했다.
“(그의 영화를 보고) 당신이 유혹에 넘어가든, 말든 그건 당신의 사랑에 대한 기억의 문제이다.”
그래서, 왕가위의 영화를 보고나면 항상 긴 한숨과 함께 담배를 입에 물게 되는 거다.

*          *          *
 
<동사서독>을 다시 봤다. 10년 만이다. 다시 봐도 지루한 건 어쩔 수 없다. ‘재미를 능가하는 압도적 지루함’이다. 그래도, 처음 봤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이 보인다. 아니 알았더라도 그 심도를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이 이제는 좀 더 깊숙이 마음을 파고든다. 나이가 들면 더 그러려나? 그때는 정말 아플 것 같다.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사랑을 조각낸 후 재배열한다. 시간순서도 미로처럼 엮어놓아서 느리디 느린 템포로 흘러가는 영화를 따라가기 쉽지 않다(사실,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르겠다). 영화 막바지―양가휘와 장만옥의 대화에 이르러서야 영화 내내 궁금했던 여러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다. 동사는 왜 그리 여자들을 울렸는지. 서독의 형수는 왜 서독을 따라 나서지 않았는지. ‘취생몽사’의 진의는 무엇이었는지 등등.

여러 에피소드들이 엮여 있지만 이 모두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기억과의 싸움'으로 퉁쳐진다. 황량한 사막에서, 깊은 동굴에서, 아니면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며 그들 각자가 벌이는 이 싸움은 사실 이미 패배가 내정된 싸움이다. 시간은 내편이 아니다. 망각의 자유도 없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도 잊혀 지지 않고, 잊으려 노력할수록 또렷이 기억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취생몽사는 그녀가 내게 던진 농담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래서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어쩌면 ‘사랑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일회성’이라는 삶의 비극 아래, 한 번 엇갈린 순간 이후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남은 인생을 내내 곱씹고 또 곱씹어보면서 복기하는 것. 후회하고 자책하고 미칠 지경이 될 정도로 괴로워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 씁쓸하게나마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얻지 못한 사랑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동사서독>을 다 본 후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불을 뒤척거리다 얼마전 시집에서 읽은 문장 하나가 생각났다.

언제나 조금 늦거나 빨리 오는 것들이 있네. 가령, 당신……고백……
― 이장욱, 2011,「평균치」,『생년월일』, (주)창비, p.28


*          *          *
 
덧붙이는 말.
 
하나. 소설 영웅문을 읽고 난 후 다시 <동사서독>을 보면서, 아무런 정보도 없이 제목에 낚여서 극장에 왔다가 ㅆㅂ거렸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에서 ‘원작― 김용’을 발견하고는 ‘뭐라고, 이 ㅆㅂㄹㅁ’ 했겠지. 후훗―.

둘. 장만옥이란 배우를 왜 미처 몰랐을까. 아니 이 나이쯤에서야 진가를 알 수 있는 배우일지도

아무리 생각해도 장국영은 동사에 어울린다. <동사서독> 캐스팅 비화 등 재밌는 이야기들(링크)



 


영화 2012/02/15 10:22

속도, 빛의 질감, 거울...그리고 장만옥



화양연화 (2000)

In The Mood For Love 
9.1
감독
왕가위
출연
양조위, 장만옥, 소병림, 반적화, 뇌진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프랑스, 홍콩 | 97 분 | 2000-10-20



공기의 질감까지 느끼라는 듯 천천히 흘러드는 영상, 보는 이들을 축축 젖게 하는 빛과 색, 툭, 툭 생략된 채 날아오는 이야기의 파편들, 위험하고 치명적이게, 하지만 또 가냘프고 아슬아슬하게 긴장을 유지시키는 bgm. 보고 있자니, 녹아 내렸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 것이지 못했던 사랑과 얄궂은 운명을. 뒤늦은 후회와 자책.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도 소용없을 그 시절. 그 날, 햇살을 나눠받으며 걸었던 그 거리. 뜬금없는 나의 말에 당황하던 너의 표정. 그 속의 감춰졌던 미묘한 긴장. 사실을 알고 난 후 수해처럼 찾아 온 허탈감. 손이라도 잡아볼 걸 그랬어. 이제는 말할 곳도 들을 곳도 없는, 과거 아닌 과거의 흔적이 되어 버린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무엇을.


 
잘 만든 영화다. 사실 매우 간단한 내용을 몇 안 되는 장소에서 별 다른 잡피소드(잡것+에피소드) 없이 요렇게 만들었다. 대가의 냄새라고나 할까. 그런 게 난다. 김영하의 말을 빌리자면 “분명 왕가위는 속도의 아름다움을 아는, 그리고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였다. 빠르게 건너뛸 때도, 느리게 흘러갈 때에도 그는 속도가 수단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색과 빛, 음악을 감각적으로 다루는 거야 <중경삼림>, <타락천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왕가위의 ‘종특’인데, 여기다 예전에는 잘 느낄 수 없었던 무게감, 밀도까지 입힌 느낌이다. 가장 놀란 건, 사실 이것도 예전부터 장기처럼 썼던 건데, 거칠게 말해, 박지성급 공간창출능력이라고나 할까, 그 좁디좁은 공간을 거울을 이용해 풍성하게 팽창시켰다.(덧붙여, 거울을 통해 서로를 바라본다. 우리 역시 거울을 통해 그들의 시선을 확인한다. 그렇게 마주하는 그들의 세상은 어딘가 이질적이고 위태롭다. 너무 쉽게 깨질 수 있어서인가.) 

그리고 장만옥. 


 
한 편의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 자체보다 등장인물에 빠져들어 나중에 영화를 떠올리면 그 배우의 이미지만 남게 만드는 여배우/캐릭터가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색,계>의 탕웨이가 그랬고, <아는 여자>의 이나영이 그랬다. 그리고 이제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그럴 차례인가보다. 영화 시작하자마자 치파오를 입은, 위태위태해보일 정도로 삐쩍 마른 장만옥을 보면서 헉, 했다. 또각또각 걷는 게 왜 그리 아름다운지, 아, 치명적인 매력이란게 이런 거구나 싶더라. 이건 영하 형도 마찬가지였는지 책에다 이런 문장을 남겼다. “<화양연화>에서 그녀가 국수집 골목을 슬로우 모션을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올라갈 때, 나는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었다.” 100% 동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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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4 15:25

영화가 재밌으면 됐지, 뭐



하울의 움직이는 성 (2004)

Howl's Moving Castle 
9.2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출연
바이쇼 치에코, 기무라 타쿠야, 미와 아키히로, 가슈인 타츠야, 카미키 류노스케
정보
로맨스/멜로, 판타지, 애니메이션 | 일본 | 119 분 | 2004-12-24



사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는데, D의 추천으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보고, 정성일이 쓴 평론을 읽은 다음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는 믿고 보는 거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음악도 좋고, 그림체도 좋고, 배경도, 내용도 좋지만 뭐니뭐니해도 상상력! 야, 어떻게 요런 생각을 했을까, 하, 그걸 또 요렇게 표현하네, 뭐 그런 거에 감탄하면서 두 시간을 쓰는 거다. 별로 아깝지가 않다. 그래서 어제 본 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
시작하자마자 뿅 가더만. BGM이 은은하게 깔리면서 이건 중세도 아니고 현대도 아니고 서양도 아니고 동양도 아니고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재도 아닌 이상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첨단의 과학기술과 사라진 문명수단들이 용액처럼 한 데 녹아있는 이상한 세계, 괴상한 인물들을 펼쳐놓았다. 대단하다 대단해. 더 대단한 건, 이런 말도 안 되는 설정을 스크린을 통해 접하는 관객들이 5분 만에, 정말 짧은 시간 안에 놀랍게도 하야오의 세계에 적응한다는 사실! 요정도면

사기꾼마술사다.

영화 내용은 착하디 착한 이야기. 다 보고 나니 생각나는 게―<매트릭스 1>?
네오(앤더슨)와 트리니티/하울과 소피의 관계 사이의 유사성. 잠수함/성에서 생활하는 이들의 레지스땅스적 역할. 앤더슨이 트리니티의 사랑을 통해 네오로 탄생, 재생하는 것처럼 하울도, 소피도 상대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저주를 극복하고 젊음/생명을 얻는 일 등. 뭐 끼워 맞추기지만 비슷하더라고. 
물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매트릭스 1>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 그래도 유사성은 또 존재하는데, 요건 조금 나간 이야기지만, 둘 다 지극히 반동적이라는 사실. 현실과 가상, 실제와 본질을 전환시켜 현실감각을 무너뜨리는 <매트릭스 1>가 얼핏 보기에는 親혁명적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잘 생각해보면 영화는 지독한 ‘영웅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앤더슨은 왜 네오일까. 그냥, 네오니까. 세상을 바꾸는 건 누구일까. 네오. 왜? 네오니까. <매트릭스 1>에 따르면 결국 매트릭스를 무너뜨리는 건 네오다. 그가 영웅이 되는 이유는 전체 대중들의 선택의 결과도, 자신의 절절한 노력의 대가도 아니나. 그냥 그가 영웅이 될 운명인거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영웅’이고, 그것도 이미 의지와 상관없이 선택돼 있으며, 나머지는 이 영웅을 보좌할 역할에 있다는 주장. 요건 영웅주의다. 반동적이다. 다음으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현실을 동화로 만들어 버린다. 하야오의 영화만 보면 행복해진다. 살아있기를 잘한 거 같다. 착하게 살아야 될 것 같다. 근데 그게 좋은 게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정성일이 <오아시스>를 보고 쓴 평론이 잘 설명해준다. 길게 인용하면,

영화 <오아시스>가 만들어놓은 그 자리에서 나와, <오아시스>가 끝나고 난 다음 한공주와 홍종두가 살아야 하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별 네개를 달고 나와서 다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내와, 결코 여동생을 내주면 안 되는 가난한 오빠 가족을 둔 뇌성마비 장애자 한공주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겠는가? 그 마지막 장면에서 그렇게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이 정말 무엇을 말한다고 생각하는가? 당신이 약간 눈물을 흘리고 감동받아서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고 말하면서 영화관을 나설 때, 바로 그 순간 당신의 실천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당신은 감동받은 것이 아니라 안심한 것이다. 저 황량한 세상 속을 환상으로 버티며 살아가는 홍종두와 한공주의 진심을 알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이해심과 자비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아시스>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교착상태로 몰아넣는 것이다. 이 영화는 우리의 환상을 부추기기 때문에 역겨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갖고 있는 환상 안으로 안전하게 들어와서 자기의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홍종두와 한공주의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하고, 그래서 감동을 받았다고? 어떻게 세상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사랑을 당신만은 이해할 수 있는가? 이유는 단순하다. 그렇게 대답하도록 유도되었기 때문에 당신의 자리만이 숭고하고, 자비로우며, 안전한 것이다. 당신은 항상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 가 있다. 하긴 영화란 원래 그런 것이다. 세상일을 잊고 영화관에 온다는 것은 그만큼 비겁한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영화를 본다고 해서 세상을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세상은 괴롭지만 영화는 즐겁다. 왜냐하면 우리 대신 영화 속의 주인공이 괴롭기 때문이다. 


썅, 맞는 말인데 인정하기 싫어. 그냥 영화 한 편 보고 좋게 끝내면 안 되냐. 어쨌든, 재밌게는 봤는데, 사실 뭐, 그거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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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2/13 13:56

논리적인 것과 상상력은 별개이거늘


보고 나서 든 두 가지 생각―

하나, 만약 지금 내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꿈이라면 현실의 나는 천재다. 이렇게 real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니. 아니면 현실세계가 꿈의 세계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에 이른 사회이거나. 
둘, 유물론자들은 이런 영화를 보는데 한계가 있다. 이런 식의 공상을 하기엔 너무 논리적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이런 질문은 참신하더라. 꿈은 어떻게 내가 이 세계에 들어왔는지 모른 채 전개된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현실이라고 부르는 이 세계에 당신이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물론, 
우리는 알지 못한다. 가장 어린 시절의 기억이라고 해봐야 서너살 때니. 그러면 내가 지금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그저 주입된 것이며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냐면, “아니올시다.” 나의 역사를 증명해줄 사람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스스로가 인식하지 못하거나 누가 증명해주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질문은 글쎄, 아마 인간을, 스스로를 너무 크게 보니까 나오는 거다. 인간은 죽으면 똥 된다. 철저하게 물질이고. 그냥 유기체로서 호흡하며 살다가 수명을 다하면 가는 거다. 요렇게 생각하면, 슬프다. 팍팍하다. 근데 어쩌냐, 이게 리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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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영화 2012/02/07 11:52

다시 영화의 세계로


주말에 영화를 몰아서 봤다. <도가니>, <완득이>, <말죽거리잔혹사>, <써니>, <반두비> 이렇게 다섯 편. 순서대로.
 
<도가니>는 예상한 것보다 잘 만든 영화였다. 소설보다 나은 것 같다. 영화라는 매체의 힘이라고나 할까, 글로 자질구레하게 설명해야 했기에, 그래서 실제 사건임에도 너무나 전형적이라는 비판(참고)에 직면했던 소설과 달리 영화는 매체의 특성상 상대적으로 같은 함정에 빠질 위험이 적었다. 다 아는 내용임에도 러닝타임이 지겹지 않았으니 그만하면 됐지 뭐, 그렇다고 다시 보고 싶을 정도의 수작은 아니었던 것 같고. 
 
<완득이>는 그냥 유쾌한 영화. 생각할 게 많은 것 같지는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재밌게 봤다. 원작은 안 읽었는데 안 읽기를 잘한 듯.
 
<말죽거리잔혹사>는 D와 같이 봤는데, TV에서 대충 본 것까지 치면 한 대여섯번 봤나. 예전에 많이 보였던 장점이 이제는 애써 찾으려 하지 않으니 보이질 않네. 좋은 것도 너무 많이 보면 안 돼.
 
<써니>는, 휴. 이걸 700만이나 봤다고? 이걸 극장에서 어떻게 끝까지 보고 있지?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80년대를 아주 조악하게 다뤘다, 조악하게. <말죽거리잔혹사>에 비교하면...벨/붕. 게다가 어처구니없는 결말. 이게 해피엔딩인가. 간단히 요약해 ‘친구를 웃게 해주는 것은 결국 돈’이라는 이 저열한 결말을 보고 서민들이 느꼈을 감정이 뭘까. 그냥 넘어가나? 적어도  나는, 굉장히 불쾌했다. 
 
마지막으로 <반두비>. 잘 만든 영화지만 역시 저예산영화다운 모습. 그래도 참신한 맛. 이주노동자의 불편한 진실마저도 편하게, 쏘~쿨!하게 넘어가는 세상이라 뭐 소재가 땡기는 맛은 덜하지만 그걸 이주노동자와 고등학생의 사랑이야기로 요로코롬 풀어내다니! 그리고 살아있는 캐릭터s. <똥파리>도 그렇고 저예산영화가 히트치려면 사회일반의 시각에서 독특하지만 분명히 매력덩어리인 캐릭터를 세워놓고 봐야겠다. 주인공 민서, 요 캐릭터 아주 맘에 든다. 그리고 그걸 연기한 백진희.



탕웨이에 이어 앞으로 작품을 찾아보게 될 요배우 발견. 요게 이번 주말 가장 큰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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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2012/01/26 15:49

잘 가시라 호스트


시가 내게로 왔다, 이건 파블로 네루다 이야기고
영화가 내게로 왔다, 는 내 이야기다. 

1996년 가을. 난생 처음 영화제에 간다는 사실만으로 잔뜩 상기되었던 꺽다리 고등학생. 그에게 날아온 초대장. 그 제목은 <안개 속의 풍경>. 초대한 장본인은 이름도 외기 힘든 그리스 감독. 난생 처음 영화를 '영화'답게 본 후 한동안― 이젠 다 옛날 얘기지만, 꽤 오랫동안 시네마키드가 되었더랬다. 정말 영화감독이 되는 게 꿈이었으니까. 이 감동이 얼마나 짙었던지 아무도 빌려보지 않는 <율리시즈의 시선>이라는 영화도 같은 감독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학습하듯이 봤고―정확히는 보려고 한거지, 중간에 잤으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었던 <유랑극단>이란 영화도 대표작이란 말에 어떻게든 찾아보려 했다―결국 실패. 

오늘 아침 신문에서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부고를 읽었다.

24일(현지시간) 외신에 따르면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영화 촬영장이 있는 그리스 아테네의 메인 항구 피레우스 인근 도로를 걸어가던 중 달려오던 오토바이와 부딪히는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을 거뒀다. 경찰과 병원 측에 따르면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사고로 머리 부위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역시 큰 부상을 입은 사고 운전자는 비번인 현지 경찰인 것으로 전해졌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은 사고 당시 '또 다른 바다'(The Other Sea)라는 신작 작업에 한창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홉스봄 선생의 나이를 생각하며 이렇게 부고를 읽을 날이 멀지 않았구나 했는데 생각도 못한 테오 감독의 부고를 읽으며, 솔직히 뭐 짠하거나 그런 거는 없지만서도, 마음속에서 뭔가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다. 나를 영화의 세계로 접속시켜준 사람, 호스트, 잘 가시라.  



 

영화 2009/10/14 09:23

<대부Ⅱ>.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1974



대부 2 (2010)

The Godfather: Part II 
9.5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알 파치노, 로버트 듀발, 다이안 키튼, 로버트 드 니로, 존 카잘
정보
범죄, 드라마 | 미국 | 200 분 | 2010-10-07



 

가족을 지키기 위해 패밀리의 수장이 되어, 
갈수록 기능과 힘이 강화되어 가는 미국이란 국가 내에서 패밀리(가족)의 생존을 위해 
뉴욕을 떠나 서부로 본거지를 옮기며 과거를 정리하는 동시에 합법적인 영역으로 사업을 진출하고, 정치적인 힘, 더 큰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그 노력들은 그만큼의 처절한 실패와 함께 마이클을 고독한 야수로 만들어 버린다.

"대부의 비극 즉 미국의 비극은 마이클과 연관된 것입니다.
<대부Ⅱ>의 마지막 부분에서 당시의 미국과 마찬가지로 마이클은 독선적이었고, 모두를 불신했고, 닉슨처럼 점점 편집광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코폴라 감독의 말이다.






영화 2009/10/04 09:27

<시네마천국>. 주세페 토르나톨레. 1989


  

아주 옛날에 국왕이 연회를 열었는데
국내의 미인들은 전부 초대를 받았지
그런데 국왕의 호위 병사가 공주가 지나가는 걸 보았어
미인 중 공주가 제일 예뻤고 병사는 사랑에 빠지고 말았지
하지만 공주와 일개 병사의 신분 차이는 엄청났지
어느 날 드디어 병사는 공주에게 말을 걸었어
공주 없는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야
공주는 병사의 말에 깊은 감동을 받았어
공부는 병사에게 말했지
그대가 100일 밤낮을 내 발코니 밑에서 기다린다면
기꺼이 그대에게 시집을 가겠어요

병사는 쏜살같이 공주의 발코니 밑으로 달려갔어
하루, 이틀, 10일, 20일이 지났지
공주는 창문으로 줄곧 봤는데 병사는 꿈쩍도 안 했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눈이 오나 변함이 없었지
새가 똥을 싸도 벌한테 쏘여도 움직이지 않았어

그리고... 
90일이 지나자 병사는 전신이 마비되고 탈진상태에 이르렀어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
눈물을 억제할 힘도, 잠을 잘 힘도 없었던 거야
공주는 줄곧 지켜보았어

드디어 99일 째 밤
병사는 일어서서 의자를 들고 가 버렸어

마지막 밤에요?

그래 마지막 밤에 
이유는 나도 모르니 묻지 마라.
네가 이유를 알게 되면 가르쳐 주렴

...

전에 병사와 공주 얘기해 주셨죠?
이젠 병사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하루만 참으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겠지만
공주는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거예요
애당초 말이 안 됐어요
못오를 나무를 바라봤죠
허나 병사는 99일 동안
환상을 갖고 행복하게 견딜 수 있었어요

*          *          *

비바람을 맞으며 기다리는 그 99일동안 
과연 병사는 행복했을까
아니, 끊임없이 100일 째가 걱정되어 불안했을꺼다.

환상이란 건 
때론 현실을 잊을 수 있어 힘이 되지만,
결국엔 깨지게끔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슬프다.

(2009년 10월 04일 이글루스에 쓴 글)




 
영화 2009/09/12 09:48

<대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대부 (2010)

The Godfather 
9.4
감독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출연
말론 브랜도, 알 파치노, 제임스 칸, 리차드 S. 카스텔라노, 로버트 듀발
정보
드라마, 범죄, 스릴러 | 미국 | 175 분 | 2010-05-27



 

가족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일원이 되었으나, 
결국 조직을 위해 가족을 버려야 하는,
Family를 지키기 위해 family를 버릴 수 밖에 없는 가혹한 운명이
너무나 잘 나타는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후 2부에서 더욱 차가운 보스로 변할 마이클과
그 변모만큼 벌어질 가족과의 거리를 예고하고 있다.

정말 명장면이라고 생각한다.


(2009년 09월 12일 이글루스에 쓴 글)





 


영화 2009/09/12 09:45

<아는여자>. 장진. 2004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너무나 은밀한 감정이어서,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다른 누가 아는 순간, 그 '사랑'이라는 마음 속 그 벅찬 마음이 산산히 조각날 것만 같아서,
술 자리 친구들이 농담처럼 던지는 "너 누구 좋아하냐"란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는 것이고,

혹여나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 그 사람 주변을 서성이다,
가벼운 행동 하나,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도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감히 내 주제에란 마음에, 
그저 쳐다보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고,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이라고 생각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 장면이다.

이 장면 하나로 인해 이나영을 좋아하게 되었고, <네 멋대로 해라>를 찾아보게 되었고,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사랑'이란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2009년 09월 12일 이글루스에 쓴 글)



 
영화 2009/09/10 09:52

<어바웃 어 보이>. 폴 웨이츠


1.
대학시절, 내가 후배들한테 자주 해준 이야기 하나.
“사람은 태어나서 세 가지의 환상이 깨지면서 어른이 된다. 가장 먼저는 부모님에 대한 환상, 다음으로는 선생님에 대한 환상, 마지막으로는 세상에 대한 환상. 부모님도 인간이고, 선생님은 ‘님’이 아니라 기능인일 뿐이며, 이 세상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정의롭지 않다는 걸 알아나가면서 어른이 되는 거지.”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아마 이게 제일 중요한 사실인 듯 한데 바로,

사람은 자기자신이 정말 볼품없는 존재임을 알고 나서야 진정한 어른이 된다.

2.
어렸을 땐 내가 세상의 주인공인지만 알았다. 가끔 나한테 서러운(?) 일이 닥칠 때마다 이건 몰래카메라야, 어딘가 사람들이 숨어있다가 나에게 ‘서프라이즈’하면서 모든 걸 해결시켜줄꺼야라고 믿었을 때도 많았더랬다. 혹은, 지금 나는, 내가 알지도 못하는 과거로 인해 비루하게 영락되어 있는 존재지만 결국엔 미운 오리 새끼처럼 백조가 될 거야라고 기대했던 적도 많았고 말이다. 그런데 이젠, 아니다.

20대를 지나면서 내가 가장 뼈저리게 느낀 사실은 나란 놈이 사실은 정말 별 볼 일없는 존재라는 거다. 난 세상에 반드시 있어야할 능력자도 아니고, 영락한 왕자도 아니고, 누군가가 지켜줘야 할 마음 착한 사람도 아니라는 것, 실은 능력도 없으면서, 가슴 속에 시커먼 마음을 담고, 명석하지도 않은 두뇌로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는 사실. 여기에 한 번의 긴 연애를 거치고 나면 스페셜이 아닌 노말보다 더 추락해 추한 인간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바로 그걸,

인정하게 되었다.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3. 
<어바웃 어 보이>에서 휴 그랜트가 끌리는 건 그래서이다. 
여기에 거창하게 붙은 “인간은 섬이다, 아니다” 뭐 이런 건 관심없다. 그냥,
남들이 보기에 비루하게 사는 게 맘에 들었다. 아버지가 물려준 저작권으로 먹고 사는 게 부러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보기 좋았다. 무언가를 하려한다는 건 자기가 그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
적어도 난, 그런 존재가 아닌 거 같다.


(2009년 09월 10일 이글루스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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