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툴바


블로그 이미지
잠시의진실

Rss feed Tistory
2012/05/17 15:28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기초 세트

저자
알랭 드 보통 지음
출판사
| 2012-05-09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정이현과 알랭 드 보통의 공동기획 장편소설 두 편!한국을 대표하...
가격비교



정이현과 보통, 그 둘이 같이 소설을 냈다는 기획만으로 일단 흥분. 

책을 받자마자 읽었다. 두 번 읽었다.


* 첫인상

보통의 소설 「한 남자」는 소설이라기보다 에세이. 주인공 ‘벤’의 이야기보다 보통 선생의 강의에 무게가 쏠려 있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은 철학 설파의 도구. 하긴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렇지. 벤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 자체의 매력은 떨어진다. 그래도 단숨에 읽어 재낄만큼 맛있는 책이긴 하다.

정이현의 소설 「연인들」은 오늘 한국사회에 2-30대에겐 너무 익숙한 이야기. 이 익숙하고 평범한 것을 ‘바닐라향처럼 달콤하게, 때로는 가슴 아프도록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정이현의 힘. 「연인들」에 정이현 소설의 핵심 키워드인 ‘파국과 봉합’은 없지만, 그래서 충격이나 환기 같은 것은 없지만 또 다른 키워드인 ‘씁쓸함’은 여전히 짙게 배어있다.


** 살펴보기 하나―<사랑과 전쟁>의 고상한 버전

알랭 드 보통의 「한 남자」는 낭만적 사랑의 불가능성에 관한 이야기다. 이야기의 시작을 보통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서 찾는다. 과학의 발전, 산업혁명과 정치혁명의 결과로 만들어진 부르주아적 세계관은 '인류는 세계의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진보는 시간의 문제일 뿐, 내일은 반드시 오늘보다 전진한다‘는 낙관적 믿음이었다. 개인의 자유와 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이 부르주아의 낙관적 믿음은 남녀간의 사랑과 결혼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과거에는 독립적 요소로 보였던 로멘스/에로스/가족, 이 세 가지 이상의 동시적 추구가 새로운 이상으로 성립된 것이다. 과거의 정략결혼이나 트루바두르, 리베르탱식의 불안/불완전한 사랑은 부정된다. 이제부터 우리는 낭만적 사랑과 성애, 그리고 가족이라는 절실한 요구를 단 한 사람, 배우자의 도움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이 자신만만한 부르주아의 야심찬 이상! 문제는, 이미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 세 가지 이상이 서로 모순적이며, 따라서 동시에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되시겠다. 


1912년에 발표한 「애정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절하현상의 보편적 경향에 관하여」라는 거북하면서도 아름다운 제목의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그토록 많은 환자들을 괴롭히는 딜레마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들은 사랑하면 정욕이 사라졌고, 정욕을 느끼면 사랑할 수 없었다.” (pp.106-107)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현대의 결혼은 섹스, 사랑, 가족이라는 세 가지 욕구를 조화시킬 수 있는 무대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들은 각각 다른 것들에 위협이 되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와 섹스하는 능력을 위태롭게 한다. 특별히 사랑하진 않지만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와 섹스하는 것은 사랑하지만 더 이상 흥분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아이를 갖는 것은 사랑과 섹스 모두를 위태롭게 한다. 그리고 사랑과 섹스에만 몰두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육체와 정신의 안녕을 위태롭게 한다. (p.139)


이처럼 부르주의의 낙관은 과학/정치/경제의 영역(상대성이론/세계대전과 파시즘/대공황)에 이어 사랑과 결혼에 있어서도 무너진다. 해결책은 있는가. 아직 낭만을 믿는 소설 속 주인공 벤은 그 해결을 찾지 못해 고뇌한다. 불륜을 저지르고, 부부를 위한 카운슬링도 꿈꿔 보지만 낭만적 사랑의 세 영역 중 어느 하나를 해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두 가지를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그는 안다. 애초에 세 가지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숙제다. 아니 불가능하지 않지만 “상황이 우리에게 몹시 불리”한 일이다. 고뇌의 끝, 소설의 마지막에서 주인공 벤이 내리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용기는 불안에 시달린다고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상대의 약한 모습에 좌절하여 상처주지 않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이 상처받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다. 자신과 같은 죄에 오염되었다고 아이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삶이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과제를 그럭저럭 계속해나가는 단순한 일. 이것이 진짜 용기이며 영웅주의다. (p.165)


마흔살 생일에 헬리콥터 안에서의 짧은 순간을 경험한 후, 벤은 이 불가능하고 불안한 ‘사랑’에 대해 앞으로도 끊임없이 실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할 것임을 알지만 훌륭한 남편, 아빠, 가장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결심한다. 이 마지막 장의 제목은 당연하게도 ‘평범한 삶을 위한 용기’다.


*** 살펴보기 둘―<브로콜리 너마저>+<내 깡패같은 애인>

정이현의 「연인들」은 지금 한국사회의 2-30대 연인들의 모습을 정확하게 포착한 소설이다. 이름처럼 평범한 소설의 주인공 민아와 준호는 평범하게 만나 평범하게 사랑하다 평범하게 헤어진다. 어디에도 ‘이런 소설 같은 일이 있다니’ 할 만한 장면은 없다. 요즘 TV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태생의 비밀도 기구한 운명의 장난도 없다. 소설 속 모든 일이, 그 전개가, 합당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그 합당하다 느끼는 마음만큼 소설은 비극처럼 느껴진다.

출판사의 주문과 달리 보통의 「한 남자」를 먼저 읽고 나서 「연인들」을 읽다보면 소설 속 벤과 보통의 고민이 되게 배부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낭만적 사랑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은 21세기 한국사회에서 그야말로 ‘낭만적인’ 것이다. 연애의 성공적 결말이 여전히 결혼밖에 없는 한국사회에서 언제부터인가 결혼은 적당한 시기에 찾아오는 인생의 당연한 과정이 아니라 상당한 능력을 갖추어야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되어버렸다. 3포세대―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세대라는 삭막한 신조어가 낯설지 않게 쓰이는 요즘, 취업난과 스펙경쟁의 각박함 속에 젊은 날의 연애 역시 사치처럼 여겨진다. 따라서「연인들」의 주인공들과 같은 우리세대에게는 ‘낭만적 사랑은 가능한가’라는 질문 대신 삶에 ‘낭만’이란 게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더 어울린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낭만’이란 멋진 말이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자리는 그리 넓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연인들」에서 민아와 준호가 결별하는 이유가 돈 때문은 아니다. 문제는 이해다. 그들은 어느 정도 서로를 이해하려 했기에 연애를 시작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었지만 그 이해가 완벽할 수는 없었기에 헤어진다. 보통이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전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들은 이별을 선택한다. (「한 남자」에 담긴 메시지는 세대를 가리지 않고 현대 부르주아 사회 안에서 보편적이다.) 하지만 이런 근본적 난제 말고도 책을 읽는 우리는 민아와 준호의 연애 근저에서 앞서 말한 ‘낭만적’일 수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왜 커피전문점과 모텔방을 전전하는가. 민아에게 할머니, 준호에게 아버지는 단지 가족이 남긴 어둠의 그늘일 뿐인가. 왜 준호는 결혼을 선뜻 결심하지 못하는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싶다는 민아를 왜 준호는 이해할 수 없는가. 민아는 왜 준호에게 “만약 이러다 임신하면 어떻게 하지?”란 질문을 했을까. 


‘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도 있고 ‘부모’도 실망시키지 않는 삶.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삶을 사는 여자도 있겠지. (p.157)


소설의 서문 작가의 말에서 정이현은 이렇게 말한다. “2012년 봄. 사랑을 위한 문장부호로 나는 느낌표 대신 말줄임표를 고르겠다.” 소설의 결말부에서 정이현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다른 곳에서 발생해 잠시 겹쳐졌던 두 개의 포물선은 이제 다시 제각각의 완만한 곡선을 그려갈 것이다. 그렇다고, 허공에서 포개졌던 한순간이 기적이 아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느낌표 대신 말줄임표/평행선이 아닌 포물선의 접점. 이게 어쩌면 오늘 우리들이 사랑을 대하는 방식이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 남는 것

「한 남자」나 「연인들」이나 애초에 기대했던 ‘기깔’나게 참신한 무언가는 없다(『사랑의 기초』에서 참신한 것이라곤 정이현과 보통이 함께 했다는 기획뿐이다). 허나 동시대인들이 평소 살면서 어렴풋이 느끼는 걸 정제시켜 이야기로 다듬은 후 독자들의 눈앞에 펼쳐놓은 것이 바로 소설 아닌가. 몇 년째 솔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랑의 소외계층/피해의식의 엑기스인 나는 이 두 소설을 통해 뭔가 위로받은 심정이다.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죽음과 불가능한 희망을 잊기 위해 일이 필요하다고 한 보통은 「한 남자」에서 “자본주의의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해 우리는 낭만적 사랑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이 순간, 설령 낭만적 사랑이 서로 모순적이고 불가능한 것이라 할지라도 불완전하나마 도피처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내게는 중요하게 다가온다. 

「연인들」의 먹먹한 결말은 그것대로 가슴에 남지만, 그보다 두 포물선의 접점이 남기는 아름다운 흔적이 더 넓게 퍼져 마음을 적신다. 읽는 내내 나의 포물선과 한때 접촉했던 이들의 포물선에 대해, 그 접촉의 순간들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했대도 충분히 의미 있는 비행이었다는 것도.” 씁쓸한 맛도 있지만 읽는 사람을 잔인하게 몰아붙이지 않기에 「연인들」은 지금까지 정이현의 이름으로 나온 모든 소설 중에서 제일 다정한 소설로 생각된다. 아마, 맞을 것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0) 2012/05/1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2012/05/15 16:4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

저자
박근혜 지음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 2007-07-23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희망의 리더, 박근혜의 자서전! 한나라당 대표최고위원을 역임한...
가격비교



박근혜 자서전을 내 돈 내고 사서 읽었다. 프로들이 몇 군데 손봐준 데는 있다 하더라도 우려(?)와 달리 대필은 확실히 아닌 듯하다. 내가 박근혜란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로 지금 책을 쓰더라고 이것보단 잘 쓰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

일단 재미가 너무 없다. 적지 않은 시간을 굵직굵직한 사건의 목격자이자 참관인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음에도 그녀의 술회는 따분하고 지루하다. 보통 이런 자서전을 읽을 때 기대하는 감춰진 진실이나 사건의 내막 같은 건 없다. 각 사건이 그녀에게 미친 영향 역시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것들이다. 결국 그녀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이 책은 읽으나 마나한 자료로 된다. 위키피디아만큼의 가치도 없다.


**

다음으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너무 정치적이다. 책이 출판된 시점이 2007 대선 경선 즈음이라 자신이 얼마나 준비된 대권후보이고 유능한 정치인인지 알리는데 책의 절반 이상이 할애되어 있다. 소제목들만 봐도, 북한에서 날아든 초청장(통일)/여자는 못 들어갑니다(여성)/나의 미래 파트너, 대한민국 젊은이들(청년) 등 자서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정책홍보물로 봐야할 구성이다. 정작 관심 있는 부분들, 가령 80년대 그녀는 생계를 어떻게 유지했는지(정수장학회), 로맨스는 있었는지, 유신시대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그녀의 이야기는 없다. '아버지는 군인인 동시에 로맨티스트, 어머니는 엄하지만 따뜻한 애국자, 그 밑에서 좋은 점만 배운 나는 정치를 잘 할 수밖에 없는 인간'―, 이건 뭐 대충 때려 써 논 자기소개서도 아니고, 솔직하다 안 하다를 넘어서 정치인 박근혜를 긍정적으로 봐주길 바라는 속셈을 너무 뻔하게 드러내놓는 게 아닌가. 

게다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 그녀의 생각은 총 60여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자서전에서 딱 한 장에 등장한다. 여기서 그녀는 ‘인권문제가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소홀시 된 부분이고 그 때문에 피해를 입은 분들을 안타깝게 생각한다’는 식의 한두 문단으로 평과와 반성을 퉁친다. 그리고 진짜 ‘악랄하게도’, 같은 장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정인숙 사건과 엮어서 동급의 스캔들로 격하시킨 후(딱 이 두 가지 구체적 사례만 언급한다.) 박정희 정권에 대한 다수의 비판을 아버지를 ‘음해’하는 ‘배신’의 시도로 간주한다. 박근혜를, 새누리당을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떠나서,

이건 좀 너무하잖아. 


*** 

애초에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재밌는 이야기가 있을 거 같아서 골랐는데 정가의 35%를 할인받아서 샀지만 그 돈도 아까운 책이다. 이것과 비교해보면 홉스봄의 『미완의 시대』는 얼마나 훌륭한 자서전인가. 이 책에서 그는 콤플렉스 덩어리였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어떻게 공산주의자가 되었는지를, 20차 소련공산당 회의 이후 깊어진 회의와 여전한 미련을, 지금까지도 볼세비키식 혁명을 기대하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다. 심지어 유부녀와의 불륜처럼 부끄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게 자서전이지.

안타깝게도 '박근혜 자서전'이란 명칭을 부제로 건 이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는 얼마나 팔렸던 지간에 망작이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이 자서전의 내용을 훨씬 능가하는 진짜진짜진짜 매력적 인물이기에 그렇다. DJ를 지지했던 우리 어머니도 좋아하는 정치인, 한반도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공주’, 처연/숙명/눈물의 페르소나. 여전히 그녀의 삶 중 커다란 영역은 은밀하게 감춰져 있다. 그걸 듣고 싶다. 박근혜의 입으로 말이다. 요 책은 그냥 정치홍보물로 생각하고 진짜 그녀의 자서전을 기다려본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0) 2012/05/1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2012/05/10 14:09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저자
앤드루 포터 지음
출판사
21세기북스 | 2011-03-0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에 아파하는 사람들!지워지지 않는 순간들에 ...
가격비교



허삼관 매혈기였나, 김영하가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소설가/작가는 두 권 이상의 작품을 써내는 사람이다. 누구나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고. 누구나, 소설 한 권, 이야기. 소설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이기에 개연성을 가지고,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반대로 소설은 누구에게나 흔치 않은 이야기이기에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이야기가 되고 , 독자의 흥미를 끈다. 하여 누구나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는 이 말은, 어떤 일탈적 경험의 순간이나 기형적 사건사고 없이 그저 평범하고 조용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과 같으며, 어쩌면 그 일탈과 기형의 경험/사건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타인의 삶과 구별해주는 것일 수 있다는 말도 된다. 


*        *        * 


누구에게든 하나쯤 있기 마련인 ‘지워지지 않는 어떤 순간’을 회상하고, 시간이 지난 다음에도 그 기억에 아파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편안한 언어로 그려냈다. 앤드류 포터는 우리 주위에 흔히 있을 법한 친근한 인물들을 통해 상처나 아픔으로 남은 기억이라고 해도 그 역시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소중한 과거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비교적 짧은 10편의 소설들로 이루어진 단편소설집이다. 읽기 쉽고, 각각의 내용도 간단하다. 작가 한명에 의한 소설집이기에, 그리고 이것이 작가의 처녀작과 같기에 수록된 소설들의 스타일은 통일적이고 메시지는 반복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무리 평범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온 이라고 해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던 순간들이 있기 마련이다. 평범한 삶 속에 감춰진 상처들을 차분하게 감싸는 앤드류 포터의 단편들을 읽다 보면 언제 생겼는지도 알 수 없던 그 해묵은 상처들이 하나씩 치유되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책에 수록된 10편의 단편 중 7편이 십 수 년 전 과거의 사건을 추억하는 형태로 서술된다. 어처구니없는 친구의 죽음을(「구멍」), 아버지와 함께 목격한 어머니의 외도를(「코요테」), 아버지뻘 되는 교수와의 로맨틱했던 모임을(「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망나니 형의 범죄와 그에 대한 자신의 방관을(「강개의 개」), 아미시공동체 소녀와의 짧았던 로맨스를(「외출」), 어머니와 이웃 아주머니간의 이상한 불륜을(「코네티컷」)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복기한다.  


위 소설들에서 인상적인 점 하나. 작중화자의 현재가 상대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보통 이런 식의 소설은 과거의 경험/사건이 현재의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고, 그 결과 현재의 자신은 과거의 영향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선택을 하게 된다는 식이다.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사건이 병렬적으로 배치되고, 과거의 극복 혹은 잔존이 소설의 주기제인 경우도 많다. 헌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 담긴 소설들은 그저 과거의 경험 혹은 사건에 대해 복기하는 것에 충실하다. 현재의 상태나 과거의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미친 영향들은 상대적으로(때론 절대적으로) 생략/삭제되어 있다. 그들은 그저 과거의 사건을, 상처를, 자신을, 꽤 시간이 지난 ‘나’의 상태에서 생생히 그리고 객관적으로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것이 주는 효과는 다음과 같은데, 과거를 되살피는 작중화자처럼 독자들은 자신의 삶 속 그늘을 추적한다. 소설 속 사건과 상처에 비추어 비록 형태나 양상은 다를 지라도 자신의 과거에 서늘하게 남아있는 기억을 또렷이 되살리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지금의 나의 상태에서 객관적으로 마주해 본다. 소설 속 내용 자체가 주는 여운이나 감동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을 매개로 열리는 독자 ‘나’의 이야기. 하여 이 소설은 매우 짧은 분량이지만 이로 만들어지는 이야기는 다른 것들보다 크고 깊다.


인상적인 점 두 번째는 작중화자의 연령. 7편의 단편에서 십여 년 전 과거를 회상하는 주인공들의 현재 나이는 모두 이십대 중후반에서 삼십대 초반 정도다. 보통 이런 회고형(?) 소설에 화자로 등장하는 나이치고 어린 편이다. 서른 즈음. 가는데 순서는 없지만 아직 생의 절반도 안 된 나이. 그러함에도 ‘고개를 돌리고 싶었던 순간’은 있고, ‘감춰진 상처’는 존재한다. 주로 가족들과 관계되어 있는, 그리고 어떠한 결정의 권한도 없는 유년기에 겪은 이런 사건과 상처는 서른의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그것은 어떻게 치유될 수 있을까. 답은 이 책을 읽는 ‘서른 살’ 독자들의 몫이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아니, 이건 그렇게 쉽게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책 소개에서는 이 문제―사건/상처의 의미와 치유에 대해 ‘소중한 과거의 하나’라고, 독자들이 책을 통해 ‘해묵은 상처들이 하나씩 치유되는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앤드루 포터라는 작가는 답을 피하고 독자들에게 맡겨 버리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그 기억들은 정말 소중한 과거의 하나로 묘사되는가. 그리고 그 해묵은 상처들은 정말 하나씩 신비하게 치유되는가. 나름 꼼꼼히 읽었지만 나는 그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작가는 상처의 의미와 치유의 방법을 이 소설을 매개로 독자들이 각자의 경험을 반추함으로써 스스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통로를 제시하였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덧붙여, 소설의 작가 앤드루 포터는 1972년생이다. 이 작품들을 쓸 때 나이는 아마 소설 속 화자의 나이와 거의 일치했을 것이다. 화자와 작가를 동일시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만 그래도 이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 좀 더 몰입하게 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독자의 나이가 이 ‘서른 즈음’에 있다면 아마 더 그럴 것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나 같은 서른을 위한 소설이다. 좀 더 나이가 많거나 나이가 적다면 소설이 주는 파장의 진폭이 보다 작을 수 있다.


*        *        *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누구나 소설 한 권을 쓸 수 있을 만큼의 이야기는 가지고 있다는 말에 대해. 나의 경우, 만약 기회가 되어 장편소설 한 권을 쓰게 된다면 나는 믿음을 잃은 신부를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쓰고 싶다. 누구보다 불타올랐던 한 신부의 종교적 열정이 어느 순간, 어떤 사건을 통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는, 하지만 끝내 그는 성당을 떠나지 못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신 앞에, 동료 목회자들 앞에, 자신을 따르는 신도들 앞에, 성당 외의 가족친지들 앞에 언제나 이중 삼중의 연기를 하는, 그런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 아마 그럴 날은 오지 않겠지만 말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0) 2012/05/1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2012/05/07 17:41

추락



추락

저자
J.M.쿳시 지음
출판사
동아일보사 | 2004-03-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무대로 흑백 간의 갈등과 폭력의 원인을 탐구...
가격비교



오래두고 읽을 책이 하나 더 생겼다.


*

한때는, 반영론적 관점에서만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질과 의식, 토대와 상부구조, 작품은 시대의 산물이다, 작가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등등.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죄와 벌』은 19세기 중반 시대상황, 야망은 넘치지만 무능력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불만/불안에 대해 알아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님의 침묵>은 3.1운동의 패배에서 기인한 저항시로, 님=조국의 독립, 날카로운 첫 키스=3.1운동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상실의 시대』는 전공투의 ‘거짓말 같은’ 패배로, 『1984』은 스탈린주의/기형적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적 가치가 몰락하는 1920년대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한다. 이것이 작품을 진정으로 올바르게 대하는 것이고, 한발 더 나아가, 그렇게 읽힐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훌륭하다 할 수 있다, 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글쎄, 요 몇 년 나의 독서를 놓고 보았을 때, 물론 반영론적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긴 하지만, 그보다는 효용론에 더 입각해 있는 것 같다. 라스콜리니코프는 19세기 러시아에서만 유효한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이, <님의 침묵>에서 님은 정말 님일 수도, 키스가 정말 키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학을 통해 느낄 수 것은 그것을 잉태한 시대의 향기보다 내가 자리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내 머릿속에 지배적으로 자리 잡았다. 문학은 결코 몇 마디 문장과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이다, 라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알면 알수록 알게 되는 건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여기에도 적용된다.


** 

하지만 간혹 어떤 소설들은 시공간적/역사적 배경이 그것을 이해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할 때가 있다. 가령, 『태백산맥』과 같은 역사소설들, 스탕달의 『적과 흑』이나 오웰의 『동물농장』 같은 작품들. 최근 한국문학 중에는 『도가니』나 김연수의 『원더보이』 같은 일종의 정치소설들이 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존 쿳시라는 지적인 작가가 지은 『추락』도 바로 이런 소설 중 하나다. 아파르트헤이트가 형식적으로 청산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충분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소설의 진미를 제대로 맛보는데 한계가 있는 작품이다. 책을 다 읽고, 부족한 정보를 찾다가 발견한 리뷰 하나. 최근에 본 문학리뷰 중에 제일 괜찮다. 링크

리뷰를 보고 나서야 주인공들의 입장과 선택, 결과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왜 루리는 유죄를 인정하고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 않는지, 왜 루시는 개인의 치욕을 역사를 통해 해석하려 하는지, 왜 그들은 끝내 ‘단념’하고 마는지를 말이다.


“아버지가 그 문제를 다시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말씀드릴게요. 그 이유는 제게 일어난 일은 순전히 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에요. 다른 때, 다른 곳에서는 공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곳, 이 시점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그것은 제 일이에요. 전적으로 제 일이에요.

“이곳이 어때서?

“이곳이 남아프리카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네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 너는 너한테 일어난 일을 순순히 받아들임으로써 에팅거와 같은 농부들로부터 거리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니? 너는 여기에서 일어난 일이 하나의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만약 이걸 통과하면, 너는 미래를 위한 자격증과 안전한 행동지침이라도 받을 것 같니? 아니면 재앙이 너를 지나쳐 가도록 문 위에 페인트로 쓸 무슨 신호라도 받은 것 같니? 루시, 복수는 그런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다. 복수는 불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집어삼키면 집어삼킬수록 더 굶주려 하는 법이다.” 

(pp.169-170)


*** 

물론, 역사적 배경지식이 없는 상태라 하더라도 이 소설은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일단 술술 읽힌다. 한 번 펴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짧은 문장과 부딪히는 대화가 자아내는 가쁜 호흡을 독자들도 따라가게 된다. 물론 그 안에 담긴 답답함도 함께 말이다. 대화는 공전하고, 사건은 극적인 설정(교수―제자―추문/레즈비언―강간―임신)으로 인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 충격적 사건의 원만한/합리적인 해결을 기대하는 독자들을 소설은 막바지로 갈수록 당황스럽게 만든다. 끝내 이해되지 않는 미스테리물처럼. 커뮤니케이션을 가르치는 교수가 대화의 가능성을 불신하고 딸과의 소통에 실패하듯 독자들 역시 루리와 루시의 선택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로서는 그 사람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난 당신이 이 개를 한 주 더 살려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개를 단념하시는 건가요.”

“그렇소, 단념하는 거요.” 

(p.331)


결국 남는 건 단념. 신기하게도, 이 충격적 사건의 이해되지 않는 결말을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단념’이라는 정서로 온전히 받아드리게 된다. 왜일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지 않아도, 그 상황과 실정에 꼭 맞는 ‘추락’을 경험하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는 나름의 비슷한 경험을 삶에서 겪기 때문일까. 자신의 처지를 역사를 통해 합리화하고, 수긍하는 것이 그리 특수하지만은 않은 일이기 때문일까. 역사적 화해의 어려움을, 순조로운 교체와 이행이라는 낭만적 주문의 불가능성을 너무 잘 알아서일까. 

다이나믹하기로는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땅에 나서 자란 나 역시 이 ‘단념’의 결말을 가혹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무력하고 수동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 한 때는 이런 정서야 말로 삶에 대한 기만이고 역사의 질곡이라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단념 역시 온당한 삶의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확실히 나이를 먹으면 사람이 바뀌나 보다. 좋게 말하자면 이제야 제대로 철이 드는 걸지도.


****

마지막으로, 소설에는 루리 교수와 딸 루시의 추락 외에 바이런―테레사의 이야기가 주요하게 나온다. 아마도 이 이야기 역시 소설의 주제에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한데, 바이엘은 알아도 바이런은 모르는 공학도인 나로서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 이건 이 책을 다시 읽고 난 후에 다뤄봐야겠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0) 2012/05/1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J.M.쿳시, 추락
2012/05/07 11:44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나를 부르는 숲

저자
빌 브라이슨 지음
출판사
동아일보사 | 2008-03-25 출간
카테고리
여행
책소개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의 대표작 나를 부르는 숲. '뉴욕타임즈'의...
가격비교



지하철에서 읽다가 미친놈처럼 키득거렸다. 그만큼 웃긴 책이다. 특히 곰! 이제 책 표지의 곰만 봐도 웃긴다.


*

책을 읽고 주변에 간단히 산보할 수 있는 코스를 찾게 되었다. 무슨무슨 둘레길이 근처에 여기저기 있더구만. 주말에 두세 시간 산행으로 운동부족을 해소해야겠다. 이 책이 내게 준 실제적 효용 하나.


**

『나를 부르는 숲』은 여러모로 ‘허약한’ 두 친구가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며 벌이는 일종의 여행기로 읽어도 재미있지만(당연히 이게 합당하지만), 김영하의 주장처럼, 책에 등장하는 스티븐 카츠를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로 상정하고 읽으면 더욱 흥미롭다. 그 순간 이 책은 여행에세이에서 소설로 분류이동 한다. 여행기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라는 소설의 단순한 구조로 해석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일종의 맥거핀(macguffin)이고, 브라이슨과 카츠는 두 명의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인물들이 아니라 한 존재의 양면 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중자아라 볼 수 있다. 여행을 결심하고, 여행을 통해 떠나온 곳과 떠나갈 곳에 대해 생각하고, 무엇보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여행의 결과로 스스로 한 단계 성장하는……. 여기에서 여행을 어떤 사건으로 대치시키면 이게 바로 지극히 일반적인 소설의 구조이나 내용이 아닌가. 


*** 

출판사 제공 책소개에서 이 책을 두고 “브라이슨의 매혹적인 이야기는 마지막 남은 위대한 자연을 보존해야 한다는 감동적인 호소”라고 이야기하는데, 글쎄, 그건 좀 제한적인 이야기인 것 같고, 뭐랄까, 이 책은 자연보다 인간/환경보호라는 외향적 슬로건보다 성숙과 발전이라는 내향적 테마에 더 가까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책의 마지막 부분. 브라이슨과 카츠가 트레일 종주 도중 서로 길을 잃고 방황하다 다시 만난 후 종주 중단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그리고 비록 완주에 실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애팔래치아 트레일이 자신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평하는 대목에서, 지금 이 순간 어려운 여정을 걷고 있는, 혹은 앞으로 걸어야 하는 우리들은 스스로의 삶을 각자 짚어볼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 중도반단한 일에 대해 이제는 안정을 찾고 겸허히 평가하는 마음으로 술회할 수 있지 않았을까.


p.s. 

투덜거림에도 위트가 있어야 한다. 이게 이 책이 내게 준 실제적 효용 둘.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0) 2012/05/1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2012/04/30 11:58

자신감과 위안



남한산성

저자
김훈 지음
출판사
학고재 | 2007-04-1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그해 겨울, 47일 동안 성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칼의 노래...
가격비교



김훈의 『남한산성』을 다시 읽었다. 


하드보일드한 문체, 혼잡스레 섞이는 말들이 자아내는 혼란, 기승전결의 탁월한 구성, 계절적 변화의 사건에의 연결, 날쇠라는 허구적 인물이 나타내는 상징적 효과,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이 배경이기에 피할 수 없는 구속력과 진중함. 잘쓴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이나 작가의 창작의도는 친절한 김훈씨가 서문에 남겨놓았으니 링크(링크)


처음 읽었을 때도 느낀 바지만, 참 나쁜 소설이다. 삶에 자신감이 사라진다.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위안을 받는다. 누가 뭐래도 삶은 어려운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인조도, 최명길도, 김상헌도, 서날쇠도, 무엇보다 김류도. 난데없고 유례없는 일을 처음 맞닥뜨렸을 그들에 대해 연민이 생겼다. 어찌할 수 없는 일에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맡은 역할에 적절히 연기(演技)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비단 ‘남한산성’에서만의 일로 그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든, 누구에게나 삶은 일회성이다. 현재는 미답의 길로 눈앞에 있다. 하여 우리는 당면한 일 앞에 모두 똑같이 어렵고, 힘들며, 무력하다. 삶에 자신감이 사라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러면서도 위안을 받는다는 말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참 적절한 타이밍에 이 책을 볼 수 있었다. 이 여운은 오래 지속될 것 같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낭만적 사랑에 대하여  (0) 2012/05/17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2012/04/24 09:41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흑산

저자
김훈 지음
출판사
학고재 | 2011-10-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저 너머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조선시대 천주교 박해와...
가격비교



김훈의 『흑산』을 읽었다. 


*

소설은 조선 후기 천주교도들에 행해진 박해를 소재로 한다. 성리학의 원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조선에서 천주를 받아드린 사람들. 그들의 수효는 적었으나 뜻은 위험했다. 뜻이 위험한 만큼 벌도 엄했고, 수가 적어 완전히 도려낸다 한들 문제될 게 없었다. 조선의 천주교는 비선의 점조직이었기에 수사는 잡힌 이들의 입에 의지했다. 입에서 입으로 죽음이 풍문처럼 옮아갔다. 가혹한 매질에도 끝내 주를 버리지 않은 이들은 죽음으로서 영생을 얻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배반으로 살아난 이들은 삶을 되찾았다.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었다. 

『흑산』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황사영과 정약전의 대비이다. 창작의 배경과 동기, 목적을 친절하게 작가후기로 남겨놓는 김훈은 말한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은 유자儒者의 삶과 꿈, 희망과 좌절을 생각했다. 그 바다의 넓이와 거리가 내 생각을 가로막았고 나는 그 격절의 벽에 내 말들을 쏘아댔다. 새로운 삶을 증언하면서 죽임을 당한 자들이나 돌아서서 현세의 자리로 돌아온 자들이나, 누구도 삶을 단념할 수는 없다.


유배지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흑산에서 정약전은 후학을 받고, 여인을 품고, 자식을 얻고, 책을 펴낸다. 세상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돌아갈 곳은 없고, 그리워할 이는 있으나 마주할 수는 없어 정약전은 술이 는다. 이렇게 지속되는 삶에 어떤 목적과 의미가 있을까. 가고자하는 방향이 없을 때 길은, 마노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 자체로 목적과 의미로 된다. 아마, 삶도 마찬가지일 테다. 


금기의 천주를 모시지 않더라도 당대 민초들의 고생은 매한가지였다. 맞아죽는 일과 굶어죽는 일이 동시에 두렵듯 사학죄인으로 쫒기나 관리들의 학정에 뜯기나 고난은 차이가 없었다. 황사영과 정약전의 대비와 별개로 『흑산』에 등장하는 여러 민초들은 천주의 교리를 각자의 고단한 삶의 이력 안으로 자연스럽게 합해버린다. 길에서 길이 이어지듯, 두물머리에서 두 물이 합쳐 흐르듯. 

작가는 그들의 개명(開明)을 축복하지 않는다. 천주를 믿음으로서 죽음의 형태가 달라졌을 뿐, 애당초 삶이 고난이었기에 역시 애써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지도 않는다. 시대와 처지 앞에 붙들려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면 삶은 원래 그러해야하는 자리에서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마부도, 중인도, 어부도, 노비도, 학자도, 대비도 '현재'와 '여기'라는 시공간의 좌표에 고정된 인간에 불과하므로 그들은 미혹하고 무력하다. 그들은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 것이고, 그렇게 죽을 것이다. 


순매의 몸을 안으면서, 정약전은 끌려온 곳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라고, 질퍽거리는 순매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p.302)


**

확실히 나이가 들면 염세적이 되는 걸까. 예전에는 부정하고 싶었던 ‘김훈’식 사고에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남한산성』에서 느꼈던 무력감이 『흑산』을 통해 되살아난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미래의 법정에서 언제나 유죄로 되는 현재에 사는 내가, 알면 알수록 알게 되는 것은 모른다는 사실 뿐인 지금의 내가, 그저 살아가는 일 외에, 과연, 무엇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흑산』을 읽고 나서 『남한산성』을 보고 있다. 둘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똑같이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지만 주제의 뉘앙스에서 차이가 난다. 글의 스타일은 비슷비슷하지만 구조는 전혀 다르다. 내 경우, 끊임없는 말들의 섞임이 자아내는 혼란과 한겨울 삭풍처럼 날 선 문장―글의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어버리는 『남한산성』이 더 마음에 든다. 『남한산성』은 10페이지만 읽어도 내가 지금 대단한 걸 읽고 있다는 생각을 먹게 한다. 확실히 대단한 소설이다. 다 읽은 후에는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어야겠다. 읽다 덮었을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남한산성』―『공무도하』―『흑산』 사이에 낀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완독하고 판단해야겠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짜 자서전을 기다린다  (0) 2012/05/15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김훈, 흑산
2012/04/18 11:15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올리브 키터리지

저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5-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올리브, 오늘은 무슨 일이지요?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아트 세덴바움...
가격비교


*

퇴근길 버스에서 김영하의 목소리로 이 소설집 맨 앞에 실린 「약국」을 들었다. 한 중년남자가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보다 훨씬 젊은 여인에게 품었던 애틋한 감정을 고백조로 풀어내는 이야기. 부정(父情)과 동정, (이제는 사라져만 가는 가치에 대한) 향수와 이성으로서의 마음이 한데 뒤섞인, 이 복잡한 감정은 과연 사랑이려나. 한 시간 남짓, 소란스러운 버스에서 소설을 들으며 꽤나 마음이 울렸다. 예전 같으면 분명 지루하게 느껴 그렇게 오래 듣지도 않았겠지. 확실히 요 몇 년 새 부쩍 늙어버린 느낌이다.


**

『올리브 키터리지』는 매력적인 소설집이다. 누군가의 비평처럼 "한 인물을 택하여 그가 속한 커뮤니티를 통해 인물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발상이 뛰어나다." 잔잔한 일상과 그에 대비되는 비일상적 충격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소설을 지배한다. 무엇보다, 13개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이 너무 생생하고 매혹적이다. 그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다. 하지만 13편 모두 비슷비슷한 전개로 이루어지는 점, 부러 딴죽 올리듯 이야기를 지연시키는 작가의 서술 등은 확실히 읽는 맛을 떨어트린다. 13개나 썼어야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어쩌면 그냥 연작소설집이 아니라 「약국」, 「불안」 요렇게 낱낱의 단편으로 읽었을 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매우 인간적인 작품. 외로움과 상실이 매 페이지마다 배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트라우트는 부드러운 유머와 자양분 넘치는 희망의 약을 함께 건넨다.

―북리스트 (미국도서관협회) 


그래도 『올리브 키터리지』는 400페이지가 훨씬 넘는 분량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는, 분명 매력적인 작품이다. 매 이야기가 전하는 삶의 뼈아픈 진실들은 가슴 속에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삶의 뼈아픈 진실이라……. 거칠게 말하자면 이렇다. 


①트라우마는 끝내 극복되지 않는다. ②일상에 검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갑작스런 불행과 그에 대한 공포,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외부에 있지 않다. ③이해되지 않는 관계 속에서 그래도 서로 이해하며 살아야하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겨진 삶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엄마(올리브)와 아들(크리스토프)는 끝내 화해하지 못한다(「불안」). 갑작스러운 사고가 진정한 불행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일상 속에 감춰졌던 관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여행 바구니」, 「다른 길」). 그러나 그 관계가 아무리 실망스럽고 허무하게 느껴지더라도 우리는 결코 혼자 살 수 없으며 누군가를 위로하고 또 누군가에게 위로받아야만 한다(「굶주림」, 「강」).


어쩌면 단순하고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이 소설을 통해 꽤나 깊숙이 가슴에 밝히는 건 그만큼 작가가 능력이 있어서겠지.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데, 그걸 대단하게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확실히 이 책은 읽는 동안 내용과는 별개로 그냥 ‘잘 쓴 소설’이라는 생각을 먹게 만든다. 이야기의 결말과 내용보다 그 분위기에 취해 읽은 소설은 『남한산성』 이후 꽤나 오랜만인 것 같다. 


이 소설의 힘은 바로 그 점이다. 가슴을 후벼 파는 듯 예리하게 와 닿는 문장으로 독자의 정서에 진하게 호소하는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배우자와의 관계, 갈등과 상처와 애정, 어느 하나 내 일 같지 않은 장면이 없다.

―역자후기 중


***

첨언. 이상하게 읽는 내내 ‘9.11테러’가 떠올랐다. 총기사고, 원한살해, 인질강도 등 소설에 등장하는 비일상적 사건사고들. 그리고 그로 기인되는 일상의 변화 또는 환기를 생각해볼 때 어쩌면 이 소설의 출발점은 9.11테러가 아닐까 하는 생각. 그래서일까,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정이현의 「삼풍백화점」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또 하나는, 더 이상하게도, 소설을 읽는 내내 <브로콜리 너마저>를 듣는 느낌이었다. 잔잔한데, 확실히 잔잔한데 평온하지 않다. 투명한 유리잔에 미세한 금을 발견할 때처럼 불안한 심정. 깨질 것이 분명한데 미련하게 외면하고 싶은 마음.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른 즈음에 읽는 소설  (0) 2012/05/10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2012/04/09 16:09

너의 의미



오빠가 돌아왔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2-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유쾌한 이야기꾼 김영하의 소설집!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가격비교


오랜만에 그 '꿈’을 꿨다. 잠을 깬 직후에는, 그래도 예전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하지는 않구나, 했는데 웬걸, 하루 종일 ‘꿈’이 빚어낸 습기에 축축이 젖어버리고 말았다. 윤상의 노래. ‘이럴 줄 알았어. 내가 말했잖아. 난 절대로 너를 잊지 못한다고. 자랑할 일은 아니란 걸 알지만.’

*
1주일 동안 『오빠가 돌아왔다』를 다시 읽었다. 예전보다 훨씬 천천히, 그리고 훨씬 재밌게. 김영하의 단편에는 확실히 장편과는 다른 맛이 있다. 그 단편에서의 맛을 이제 좀 분명히 알 것 같다.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작품은 「그림자를 판 사나이」(링크). 그리고 책을 덮은 지 하루가 지난 지금 이 순간 가장 마음에 남는 작품은 「너의 의미」.

남자는 그 여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왜 하필 그 여자인지 끝내 납득하지 못했다. 왜 하필 너지? 누구에게도 소개할 수 없고 못생겼고 정말 형편없는 너, 그런데 왜 너의 매력은 시들지 않지? 그리고 너로 인한 이 고통은 왜 이토록 오래 지속되는 거지? 출판사 편집장을 괴롭힌 건 바로 그 문제였다. (p.184)

분량의 절반 이상을 주인공의 ‘양아스러움’을 보여주는데 할애한 소설은 주인공의 이 독백을 통해 직접적으로 문제를 던진다. 정말,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혹은,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
‘꿈’ 때문일까. 이 말도 안 되는 질문을 계속해서 곱씹고 있다. 왜, 너를, 나는, 아직도. 물론 답은 없다. 답 비스무리한 것을 ‘질문자’인 김영하가 『위대한 개츠비』의 역자후기/해설에서 내놓은 바 있는데,

요컨대 데이지는 인간 개츠비가 아니라 영국제 셔츠를 사랑하는 여자다. 개츠비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쩔 수가 없다. 사랑할 가치가 없는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한다는 것, 아니, 그 여자를 지독하게 사랑하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상투적 로맨스의 무덤에서 부활해 하늘로 승천한다. 개츠비의 '위대함'은 그가 인류에 공헌했다거나, 뭔가 엄청난 업적을 쌓았기 때문에 붙은 수식이 아니다. 그는 무가치한 존재를 무모하게 사랑하고 그러면서도 의연하게 그것의 실패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여전히 자신의 상상 속에 머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위대하다. 따라서 그 위대함에는 씁쓸한 아이러니가 있으며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나의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일까. 나의 꿈에도 씁쓸한 아이러니가 있으며 불가피한 자조의 기운이 스며 있는가. 글쎄, 100% 동의하기는 힘들다. 나의 경우에는,
아니다. 잘 모르겠다. 떠오르는 건,
시시포스. 산꼭대기로 계속 바윗덩어리를 굴려 올리는 시시포스. 끝내 정상에 오르지 못하는 가련한 시시포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락  (0) 2012/05/07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2012/04/04 17:20

그림자를 판 사나이



오빠가 돌아왔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2-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유쾌한 이야기꾼 김영하의 소설집!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가...
가격비교


오랜만에 김영하의 팟캐스트를 들었다. episode 35. <그림자를 판 사나이>. 김영하의 자선대표작답게 이곳저곳 많이도 실렸고, ‘김영하수집광’인 나로서는 이미 여러 번 읽은 소설이지만, 김영하의 굵직한 음성으로 듣는 소설은 지금껏 읽은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늦은 저녁 지하철에 앉아 두 눈을 감고 김영하의 목소리에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운다.’라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묵직하게 내 가슴을 때린다. 그제야 나는, 내가 지금껏 이 소설을 오독하고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
그전까지 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를 붙잡은 건 뜬금없이 등장하는 ‘자연발화’였다. 비현실적 소재의 갑작스런 등장. 일반적으로, 소설의 후반부 이런 소재의 갑작스런 등장이 소설이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던 흐름/토대/긴장을 붕괴시키지 않으려면 그것이 작품의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작품 내 사건/긴장의 해결에 필수적이어야 한다. 김영하의 바람과 달리 작가의 의도에 집착하는 스타일인 나는 당연히 이 ‘자연발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이 소설의 핵심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계속 생각했다. ‘왜 그들은 불타야 했을까?’, ‘자연발화와 안정적인 삶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왜 심장에서부터 타들어 가는 걸까?’ 등등. 읽을 때면 항상 나름의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뭔가 뒷맛이 찝찝했다.

**
그러다 어제 저녁, 김영하의 목소리로 소설을 다시 ‘읽은’ 후 깨달은 사실,
아, 자연발화는 맥거핀(macguffin)이구나. 이 소설은 제목처럼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 

데자뷰. 옛날에도 이런 순간들이 있었다. 미경은 찾아와 울고, 들어보면 바오로 얘기였다. 바오로가 찾아와 우는 때도 있었는데 들어보면 미경 얘기였다. 그들은 털어놓아야 할 뭔가가 있었다.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에겐 누군가의 영혼에 어둠을 드리울 그 무언가가 없었다.

소설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아주 러프하게 요약하자면, 
깔끔하고 평온한 일상을 사는 서른다섯 독신의 소설가 ‘나’가 지진과 함께 찾아온 두 친구(바오로, 미경)의 연이은 고백을 들으며 충격을 받는 동시에 한편으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에 대한 상상으로 활기를 느끼지만 곧, 상상은 끝나고 현실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요걸 조금 다르게 표현하면,
누군가의 삶(또는 영혼)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는, 그래서 아직 그림자가 없는 ‘내’가  바오로, 미경의 삶을 보며 그림자를 가져보길 희망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하고 현실로 돌아와 운다는 이야기.

이 소설의 압권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리고 나는 운다.’ 그림자를 가지길 원하지만 그러지 못해 슬픈 주인공의 마음과 상태를 이 한 문장에 담았다. 긴 여운이 남는다. 이 여운에 이유에는 주인공 ‘나’와 소설을 읽는 ‘나’가 동시에 그림자에 대한 소망과 그것을 가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슬픔을 느끼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남는 핵심적인 질문―왜 그는, 그리고 나는 그림자를 가지길 원하는가. 왜 우리는 누군가의 영혼에 어둠을 드리우길 희망하는가. 

****
다음은 소설의 시작―두 가지 질문. ①내 손안 플래시의 불빛도 언젠가는 저 멀리 있는 별에 가 닿겠지? ②창공의 새에게도 그림자가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의 대한 주인공 ‘나’의 답. ①그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빛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게 우주다. ②빛을 가로막으면 그 뒤에 그림자가 생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결론. ①세계(시공간)은 무한하고 존재는 미약하다. ②존재하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긴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가면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이어진다. “우주는 무한하고 시간은 영원한데 비해 나의 존재는 너무 미약하다. 어쩌면 그걸 잊기 위해 사람들은 계속해서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지 모른다. 아니,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겨야만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그 흔적이 내 존재의 증거가 되는 셈이다.”
앞의 질문, 왜 우리는 그림자를 원하는가에 대한 답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미약한 존재니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의 인간이니까.

*****
긴 여운이 주는 감흥은 재껴두고 이제 내 이야기. 
언젠가 주위의 모든 인간관계가 구속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과거의 실수가 채권자처럼 찾아올 때나 모든 의무들이 버거운 짐으로 느껴질 때, 나는 투명인간이 되고 싶었다. 그냥 잊혀진 존재가 되길 소망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주는 일은, 영향을 끼치는 일은 반드시 그에 맞는 책임을 요구한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버렸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림자가 없는 삶을 동경하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의 삶처럼 혼자 살고, 규칙적으로 조간신문을 읽으며, 철 지난 음악을 주로 듣고, 간소한 식사를 즐기는 일상을 나는 진정으로 소망한다. 깔끔하고 평온한 일상. 물론 때때로 평온한 일상이 주는 불만에 흔들릴 때도 있겠지. ‘대학시절의 연애상대가 자신의 대학생활은 그저 암울했을 따름이라고 말한’ 걸 전해들을 때나 혼자 먹는 밥상에서 ‘한때 함께 밥을 먹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생각나 울컥’할 때, 소설의 주인공처럼 울컥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관계/책임에 대한 공포가 허무에 대한 공포를 능가하는 경험을 하고나면 그림자를 원하지 않을 거야, 어느 누구라도 말이야. 이 신념과도 같은 생각은 여전한데―,
프로스트의 <가지 못한 길> 때문인가. 왜 계속 소설의 마지막 문장 ‘그리고 나는 운다.’가 가슴 속을 긁는 거지?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건가? 왜 하루 종일 마음속이 텅―빈 것 같은 거지? 도대체, 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행기를 소설로 읽기  (0) 2012/05/07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2012/03/11 02:11

문제는 남는 씁쓸함



오늘의 거짓말

저자
정이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7-07-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의 신작 소설집! 낭만적 사랑...
가격비교


*

나는 단편보다는 장편소설을 좋아한다. 역사적, 사회적 변화나 그 속 인물들의 부침을 다 담기에 단편소설은 한계가 있다. 사건 중심, 등장인물의 양적부족, 사회ㆍ제도ㆍ가치 조명의 한계 등도 단점이다. 무엇보다 단편소설은 쉽게 읽히는 만큼 쉽게 잊힌다. 특히 누구누구의 단편소설집라고 한데 묶인 단편소설들은 한꺼번에 읽은 다음이면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분간이 안가 나중엔 제목도 기억나지 않기 일쑤다.
그래도 언제나 예외가 있으니, 어떤 단편소설집은 어지간한 장편보다 훨씬 큰 무게감으로 삶에 파문을 일으킨다. 읽은 후 깊은 숨을 뱉는 동시에 주위를 살펴보게 된다. 조그만 수류탄에 천지가 진동하듯 얇은 분량으로도 세상과 시대와 삶에 대해 성찰하게 만든다. 내가 읽은 한국소설집 중에 3권이 그랬다. 
그 중 하나, 김승옥의 『무진기행』.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한 번에 읽은 책인데, 다 읽은 후 서울역에서 내리면서 한동안 멍해 있었다. 한참 늦게 찾아온 비보(悲報)를 듣는 느낌. 40년 전에 나온 소설이지만 어제 갓 나온 소설처럼 세련됐다는 감탄과 함께, 그 시대의 한국소설을 많이 읽지 않았는데 내가 마침 고른 것이 그 시대가 만들어낸 가장 훌륭한 걸작이란 행운을 느꼈던 책이다.
다음으로 박민규의 『카스테라』.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과 전혀 다른 소설. 21세기 한국소설의 탄생을 알리는 듯 했다. IMF―97년체제 아래 생을 살아가야할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파격적 상상력으로 다룬다. 수록된 모든 작품에서 체제의 잔인함과 삶에 대한 연민이 우러나온다. 무엇보다 참신하다. 이제는 이런 박민규식 글에 익숙해진 탓에 그의 다음 단편집 『더블』에서는 예전의 충격을 접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박민규는 매 작품을 설레는 마음으로 조마조마하게 읽게 되는 한국에 몇 안 되는 작가다.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이 소설집. 정이현의 『오늘의 거짓말』이다.

**
소설을 투구에 비교하기. 직구 같은 소설. 이런저런 잡설없이 머리통을 향해 150km/h로 달려오는 소설. 읽는 동시에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어떤 것이 중요하다는 판단이 즉시 들며, 꾸밈이 없는 만큼 묵직하게 구멍이 뚫리는 소설. 예로는 위에 말한 『카스테라』나 『죄와 벌』 등. 반대로 변화구 같은 소설. 날카롭게 곡선을 그리며 미트에 도달할 때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그래서 다 읽은 후에 무엇이 나를 들었다 놓았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소설. 예로는 『상실의 시대』 외 하루키 소설들. 그럼 정이현의 소설은 어느 쪽인가? 직구인가? 아니면 변화구인가?
내 생각엔 정이현의 소설(장편 말고 단편)은 직구나 변화구가 아니라 견제구 같다. 안전하게 출루한 주자가 방심하고 있는 순간 날카롭게 생존을 위협하는 봉중근의 견제구.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거짓말』 부록에 실린 해설의 제목, ‘당신은 파국으로부터 안전한가?’는 참 적절한 질문이다.
정이현 소설 속 인물들은 결코 모험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현존하는 세계에 100% 만족하며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일탈을 꿈꾸거나 전복을 상상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 그녀들은 자기 욕망의 매뉴얼에 따라 체제순응을 연기하는 여성들이다. 체제로부터의 일탈? 그녀들에게 그것은 체제가 부여하는 순진한 환상과 별다를 바 없는 낭만적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들은 자신들이 체제로부터의 일탈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사회를 살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간파해버린 여성들인 것이다.”

자유의 대가로서 고독을 지불해야 하듯 이곳은 ‘기브 앤 테이크’의 계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니까 말이다.(p.34)

물론 삶에 사건이 있듯이 소설에는 파국이 존재한다. 파국은 앞서 말한 견제구처럼 갑작스레 찾아온다. 그 순간 인물 앞에 <매트릭스>의 파란약과 빨간약처럼 두 개의 선택과 가능한 미래들이 등장한다. 리셋버튼을 누르고 미지의 길을 갈 것인가, 파국을 봉합하고 일상을 유지할 것인가. 여기서 정이현의 소설 속 인물들은 한결같이 후자를 선택한다. “모든 파국의 틈새를 집어삼키는 평온한 일상에의 욕망은 그토록 집요하다.” 문제는 소설이 아니라 우리. 파국은 소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의 머릿속에도 찾아온다. 그리고 우리는 인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그녀들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체제의 부당함보다 단단함을 느끼며 사는 21세기 한국시민이니까. 문제는 남는 씁쓸함. 무력감. 뭔지 모를 패배감 같은 것. 낭만적 환상이 사라지고 합리적 계산이 남은 세계, 혁명적 비전이 현실의 욕망 앞에 무릎 꿇은 시대에 이런 소설을 읽으며 욕조에 몸을 담군 것처럼 맥이 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기에 정이현의 소설은 어쩌면 가장 21세기 한국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세계8위의 경제대국, 100%에 달하는 대외의존도, 초호화명품관과 초고속통신망, 비정규직의 일상화, 워킹푸어, 하우스푸어, 극심한 청년실업과 계층간, 세대간 불화, 세계최고수준의 자살률……. 평온한 일상에의 욕망이 너무나 대단한 소망이 되어버린 시대에 정이현의 소설은 그녀의 소설 속 이야기처럼 당연한 결말처럼 느껴진다.

*** 
정이현의 소설을 견제구라 한 또 다른 까닭=뜬금없이 찾아오는 예리한 문구. 가령 이런 식.

이제 그네들끼리 해결한 문제가 남아 있을 터였다. 타인들의 삶이었다. 나는 조용하게 발길을 돌렸다.(p.91)

이렇게 따로 떼어놓고 보니까 글의 매력이 사라지네. 하지만 소설 중간에서 이런 문장들을 발견할 때마다 갑자기 하강하는 승강기에 탄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정이현의 다른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도 굉장히 좋아하는 소설집. 하지만 『오늘의 거짓말』에 더 손이 가는 이유는 「삼풍백화점」이 실려 있기 때문. 이 단편소설은 읽을 때마다 마음속 뭔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특히 마지막 문장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를 몇 번이고, 정말 몇 번이고 계속 되뇌게 되었다. 대단한 소설. 하지만 통일성에서 봤을 때 이「삼풍백화점」은 단편집 안에서 약간 이질감을 초래하는 듯하다. 확실히 다른 단편들과는 뭔가 다른 파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런 생각. 애초에 이「삼풍백화점」은 소설가들의 '자전소설'이라는 기획에 포함된 작품이라는데, 어쩌면 정말 이게 정이현 본인의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
마지막은「삼풍백화점」에 있는, 내가 정이현의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

마음과 마음 사이 알맞은 거리를 측정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내겐 몹시 어렵기만 하다.(p.59)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신감과 위안  (2) 2012/04/30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2012/03/06 21:34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2-2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운명과도 같은 그 목소리가 들리다!김영하식 슬픔의 미학을 보여주...
가격비교


*

같은 소설가가 쓴 것이라도 단편과 장편은 그 맛이 다르다. 김영하의 경우는 특히나 그렇다. 그가 쓴 단편소설은 하나같이 UFO처럼 신기한 것들로 이야기 그 자체가 매력적이다. 그걸 풀어내는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반면, 장편소설의 경우 책의 두께만큼이나 묵직한 화두가 인상적이다. 읽은 후 한참이 지나도 김영하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계속 그 안을 맴돌며 의미를 곱씹게 된다. 
단편과 장편 중 무엇이 더 나은가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지만, 단편이든 장편이든 소설이든 에세이든 김영하가 쓴 거라면 뭐든 좋아라하는 나의 경우, 그래도 꼽자면 장편이 좀 더 나은 것 같다. 아니 더 맘에 든다. 처음 이 소설가를 알게 된 것도 장편소설을 통해서였고 말이다. 지금까지 김영하가 써낸 장편소설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아랑은 왜』, 『검은 꽃』, 『빛의 제국』, 『퀴즈쇼』 이상 총 5편. 하나씩 되짚어보면,
첫 장편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경우 ‘작가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는 소설처럼 보인다. 소설 속 다음의 문장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 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살인을 하는 길.” 요걸 다시 한 번 음미. 
두 번째 장편 『아랑은 왜』에서 김영하는 이야기를 발굴하고, 생성하고, 해체하고, 조립하면서 ‘이야기가 이야기로 되는 과정’, 그 본질을 탐구한다. 전작이 도달했던 자리에서 다시 성큼 앞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다른 포스트에서도 말했지만 확실히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최고소설이지 싶다. 그리고 그 다음은 『검은 꽃』. 
내 생각엔 이즈음에서 김영하 소설이력에 뭔가 단절이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문학동네에서 뿌린 자료에서 『검은 꽃』, 『퀴즈쇼』,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한데 묶어 ‘고아 트릴로지’라고 하던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검은 꽃』, 『빛의 제국』, 『퀴즈쇼』 요 세 개를 한데 묶어 ‘한국근현대 트롤리지’라 부르는 게 더 적당하다 생각한다. 『검은 꽃』에서 김영하는 우리민족이 근대에 어떻게 접속했는지를 되새기며 그 월경의 순간에 우리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불행,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 한 명 낱낱의 개인들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을 싸늘하고도 차분하게 써 낸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 식민지시대지만 시대와 세계 앞에 한없이 초라해지는 유한자 인간의 슬픔, 그 어쩔 수 없는 패배로 찾아오는 허무감은 시대를 초월한다. 우리에게 근대는 그렇게 찾아왔다. 
『빛의 제국』은 그 이후다. 20세기 전반전을 식민지로 보낸 한반도의 후반전은 분단이었다. 분단의 기형적 상황에서 세워진 두 나라를 김영하는 주인공들의 아비의 목소리에 담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넌 인간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니?”(북), “세금 무서운 줄 알아라.”(남) 분단이 빚어낸 ‘빛의 제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 갈 곳은 있는가 하는 질문을 소설은 던지고 있다. 
다음으로 21세기. 『퀴즈쇼』는 IMF―97년체제 하에 살아가는 지금 우리들의 이야기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의 빚으로 인해 집에서 쫓겨나 고시원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IMF란 이름으로 불안의 시대에 접속한 너와 나의 모습이다. 패배가 용납되지 않고, 연대가 발 딛을 틈이 없는 삭막한 퀴즈쇼―회사의 세계는 약육강식, 승자독식의 오늘날 한국사회에 다름 아니다. 하여 주인공과 같은 학번인 나는 소설을 읽으며 마치 내 일기장을 보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이상을 정리하면 ①근대와의 접속―『검은 꽃』, ②근대화(또는 현대화)―『빛의 제국』, ③근대화 이후―『퀴즈쇼』라고 할 수 있고, 이 세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중심이 있다면 그건 세계, 그 튼튼한 구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는 인간, 그 안에 담긴 절망과 슬픔이다. 따라서 세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드는 심상은 공통적인데 일단 우울해진다. 무력해진다. 무엇보다 서글퍼진다.

**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김영하의 다음 장편을 기다렸다. 전작과 달리 뭔가 삶을 긍정할 만한, 희망이라 부를만한 걸 기대한 건 당연히 아니었다. 김영하는 그런 맛을 가진 작가가 아니다. 그런 건 다른 소설가한테 기대하면 된다. 기다렸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퀴즈쇼』 이후에 김영하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한국근현대를 다 훑은 다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어디일까? 2주전에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전혀 김영하 장편스럽지 않은 제목을 알고 나서 궁금증은 더 심해졌다. 소설을 받자 마자 다 읽고 난 후, 두 번 읽고 난 후 솔직한 내 심정은, 뭐랄까, 약간 어리둥절한 마음이다. 김영하의 시선이 향한 곳은 정말 뜻밖에도 가출과 혼숙, 폭주를 즐기는 ‘일탈’ 청소년들이었다. 음―, 이게 뭘까.

쉽게 이해하면 이렇다. 소설을 읽으며 ‘와, 리얼하다’라는 생각과 동시에 혀를 끌끌 차게 만드는 이 ‘비행’청소년들의 세계는 누가 만든 것인가. 만약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기형적인 것이라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기성세대?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우리들? 그래서 ‘너의 목소리’를 들어야 되고 고통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 안아야 한다는 사실? 다음은 이 소설 프롤로그의 마지막 부분.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저 구름 위로 올라간 마술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그의 조수를, 마술사가 사라진 뒤 내시의 피로 흥건했을 현장에 홀로 남겨졌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한다.(p.9)

하지만 이런 건 너무 식상한 주장이고 패턴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너의 목소리가 들려』라는 소설은 이런 질문을 던지려고 만든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럼 뭘까, 김영하의 의도는. 두 번이나 읽었지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몇 개 짚자면,

***
소설은 어떤 희망도 보여주지 않는다. 문제의 근원을 밝혀주거나 대안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주인공 제이는 추종자들을 데리고 대폭주를 이끌며 ‘도시의 거리에 굵고 힘찬 붓질’을 하지만 그건 동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무나 무력한 시위다. 대폭주가 일회성을 넘어서는 행사가 된다 하더라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의 클라이막스에서 제이는 대폭주 도중에 예수처럼 승천(昇天)한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다. 몇 년이 지난 후 그날의 대폭주는 잊혀진 추억이 되어버린다. 예수와 달리 아무도 제이의 뜻에 따라 살지 않는다. 그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이들(동규, 목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베드로나 바울의 삶을 살지 않는다. (감히 비교하기도 싫지만) 제이의 죽음은 헛되어 버린다. 무력하다. 여기서 생각해볼 점. 어쩌면 이런 허무와 무력이야말로 김영하가 던진 공이 아닐까. 
주인공 제이는 세상에 두 번이나 버림받는 불쌍한 놈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래서 가지게 된 능력―주위의 사물/인간과 공감하는 능력을 통해 남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능력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한다. 

너희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로 인해 아프다.(p.141)
 
허나 제이는 그 공감하는 능력으로 무언가 바꾸는 일에 하나같이 실패한다. 그는 다리 저는 붉은 도사견을 완전히 구출하지 못했고, 비행청소년들의 삶을, 악행을 바로잡는 일은 커녕, 지적장애를 가진 피해자 한나의 인식조차 바꾸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동규와 목란의 삶도 지켜주지 못했고, 그를 따른 추종자들을 다 거두지도 못했다. 제이의 행적은 여러모로 예수의 행적을 빼닮았지만 그는 예수가 되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철저하게 실패한 성자였으며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 지도자였다. 왜 김영하는 이런 실패의 이야기를, 무력한 이야기를 적어야 했을까. 그걸 통해 독자들이 무엇을 알아줬으면 했을까.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궁금하다. 

****
다음으로, 설정과 장치 문제. 김영하는 (적어도 장편소설에서) 설정과 장치를 아주 정교하게 짜는 사람이다. 『퀴즈쇼』에서 MUSE의 <unintended>라든지, 『빛의 제국』에서 서울법대생과의 쓰러썸이라든지 소설 속 사소한 하나라도 쉽게 지나칠 수 없게 만드는 능력이 김영하에겐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되는데, 가령 제이가 태어난 고속버스터미널. 그곳은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가 꾸는 한편의 악몽 같은 공간. 길과 길이 만나는 곳이자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인간들의 삶의 터전. 걸인, 노숙자, 기독교 광신도, 몸 파는 창녀와 남창, 상경객을 노리는 사기꾼, 가출한 십대들, 호객꾼들과 소매치기가 서로를 증오하며 살아가는 곳. 바로 이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정확히는 화장실에서 주인공 제이는 태어난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동원된 두 가지 사건. “종말론자들도 터미널 곳곳에 포진해 있었다. 그들의 예언자가 받았다는 계시에 따르면 1992년 10월 28일이 휴거일이었다.”와 “대합실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오랜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이는 바로 이런 시공간적 배경에서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고속버스터미널과 휴거와 한중수교와 제이. 사실 여기에 소설의 큰 맥―제이를 비롯하여 소설 속 일탈청소년들을 만들어낸 배경―이 담겨있다고 본다. 이런 걸 발견하는 게 김영하 소설을 읽는 소소한 재미 중 하나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도 이런 설정/장치들을 발견하는 건 재밌는 일이었지만, 그 재미를 덮어버리는 의문점이 있었는데, 
 
이 소설, 뭔가 잉여스럽다,는 생각. 가장 이상한 건 시점문제. 주인공은 제이. 소설 속 화자는 1장부터 3장까지는 동규, 4장과 에필로그 부분은 작가지만 4장은 승태가 주인공 시점을 가지고 있다. 의문―굳이 이렇게 나눌 필요가 있었을까? 그리고 승태가 꼭 등장해야할 필요가 있었나? 없어도 전혀 상관없었을 것 같은데? 그것보다 더 중요하게, 왜 동규를 화자로 삼았을까? 어차피 2장은 동규 없이 진행되는 제이의 이야기이고, 1장을 제외하면 소설 내내 전지적 작가시점으로 서술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 말이다. 시점을 섞어서 얻은 긍정적 효과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발 더 나아가 다음의 질문도 가능. 
왜 동규란 인물을 만들어냈을까? 동규가 이 소설에서 꼭 있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소설을 읽는 내내 이 동규라는 존재가 뭔가 어색했다. 그래서인지 동규가 겪는 ‘함구증’이나 가정의 불화 같은 부분이 잘 해석되지 않는다. 그나마 동규의 존재이유를 찾는다면 성경에서 유다의 역할로서 그가 필요하다는 것인데, 글쎄, 나는 제이의 죽음을 바라는 동규의 모습이 생뚱맞게 보였다. 많이 억지스러워 보였다.

*****
위의 의문들 말고도 답답한 부분들은 많다. 두 번을 읽었건만 내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아직도 암호투성이의 편지처럼 느껴진다. 세 번 읽으면 달라지려나? 하지만 어쨌든 확인하게 된 사실. 김영하의 새 장편이 향한 곳은 ‘비행’청소년의 공간이었다. 또 한가지 사실 주인공의 나이는 갈수록 어려지고 있고, 소설이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어지고 있다. 김영하 소설의 다음은 언제일까, 그리고 누구의 이야기일까. 기대감은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 다음은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 나오는 대사 하나. “가끔은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 것과 다른 것이 도착하는데 실은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정말로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을 거야. 바로 너처럼.” 글쎄, 이번 건 내가 기다리던 거랑 진짜 전혀 다른 게 왔는데 이게 내가 정말로 기다리고 있었던 건 (확실히) 아닌 듯싶고, 다음은 어떻게 될는지. 그리고 그걸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이 소설을 더 읽게 될는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면한 삶의 자리에서  (2) 2012/04/24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2012/02/29 00:11

불쌍타, 찰스



프랑스 중위의 여자(페이퍼북)

저자
존 파울즈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6-02-2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전후 대표적인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불리는 존 파울즈 대표작 『...
가격비교


*
이 소설의 줄거리를 한 문단으로 요약
: 빅토리아 시대 영국, 귀족 출신의 찰스는 오랜 유랑생활을 마치고 부유한 상인의 딸 어니스티나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 그의 삶에 사라 우드러프라는 여인이 등장한다. 그녀의 별명은 '프랑스 중위의 여자', 보다 천박한 말로 '프랑스 중위가 먹고 버린 년'이다. 사라는 마치 실성한 듯한 모습으로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 그녀에게 찰스는 호기심으로, 동정심으로 점점 빠져들게 된다. 몇 가지 사건이 있은 후 찰스는 사라가 지금까지 그가 만나왔던 어떤 여성보다도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고, 동시에 자신이 삼촌의 유산을 상속받지 못하게 되는 상황변화, 실업계에 진출하라는 예비 장인의 강요 등이 이어지면서 점점 심한 갈등에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찰스는 사라와의 사랑을 위해, 보다 정확히는 그의 미래를 위해, 어니스티나와 파혼을 하고 사라를 찾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랑의 삶을 2년 동안 보내고 난 찰스는 마침내 사라를 만나게 되는데, 이제 그에게 두 가지 미래가 그려진다.

이 소설의 특징을 몇 문장으로 요약(책 소개에 적힌 대로)
: 빅토리아 시대 소설과 포스트모던 소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지평의 소설이다.
옷깃의 주름에서부터 어투의 어색함에 이르기까지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을 세심하고 완벽하게 재현해 낸 작품이다. 
시대의 위선과 억압에서 벗어나고픈 두 총명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동시에, 자유에 대한 정열이 고갈되어 버린 20세기 상황에 대한 탁월한 우화이다.

이 소설을 읽은 직후 내 심정을 한 문장으로 요약
: 불쌍타, 찰스.

**
일단 재밌다. 그 재미라는 게 표현하기 어렵지만 나름대로 표현해보자면 “오―, 재밌는데?” 하는 재미라기보다 “어랍쇼, 이거 재밌는데?”하는 재미다. 음―.그리 잘 표현한 것 같지 않네. 일단 읽는 내내 위에 소설의 특징으로 적은 것처럼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사실 내가 빅토리아 시대를 알아봤자 얼마나 알겠냐만, 이런 경우 내가 의지하는 건 홉스바움 선상님, 『자본의 시대』에서 읽은 빅토리아 시대는 이러했다. ‘부르주아 세계의 확실성과 자신감’이 전면에 등장하고, 다윈주의와 실증주의 과학의 힘으로 ‘반박의 여지없는 공정한 눈으로 그들의 현재를 살펴볼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하는, 즉 ‘진보의 드라마’였다. 

진보의 드라마는 거대하고, 계몽적이고, 자신에 차 있고 스스로 만족하며, 무엇보다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드라마였다.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하지만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믿음은 얼마 안가 산산조각 나고 만다. 곧 이어 등장할 시대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원리’로 대표되는 혼란의 시대였으며, 전 유럽을 폐허로 만들 세계대전의 시대였으니 말이다. 어쨌든 다시 소설로. 
소설 곳곳에서 발견하는, 아니 거의 작가가 알려주는 빅토리아 시대의 모습들. 가령 “헤겔의 철학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시대는 변증법적 정신의 시대가 아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반대편에 서서 생각지 않았다. 역설은 그들에게 즐거움보다는 오히려 괴로움을 안겨 주었다. 그들은 실존주의적 계기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과관계의 사슬을 추구하는 사람들, 신중한 연구와 면밀한 적용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절대적인 이론을 세우고자 애쓰는 사람들이었다.” 라거나 “트랜터 부인은 젊은 시절의 솔직한 문화에 아직도 즐겁게 빠져 들었고, 찰스는 그 옛날의 솔직한 문화에 향수를 느꼈다. 작달막한 의사의 장난기 어린 눈과 즐거워하는 트랜터 이모의 모습을 보면서, 찰스는 자기 시대의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숨 막히는 점잔 빼기, 수송과 제조에 쓰이는 기계들에 대한 숭배, 그보다도 훨씬 무서운 기계들―이제 막 사회 관습 속에 만들어지고 있는 기계들―에 대한 숭배가 그를 구역질나게 했다.” 등등. 사실 이런 걸 읽고 있으면 “아, 빅토리아 시대는 이랬구나” 하는 생각보다 “아, 홉스봄 책에서 본 것 같아. 다시 ‘시대’ 시리즈를 읽고 싶다”는 생각이 더 들긴 했지만 어쨌든 소설을 통해 그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고, 씹어볼 수 있는 독서의 경험은 그 자체로 재미가 굉장히 쏠쏠한 맛이시.

***
더 재밌는 건 존 파울즈란 작가가 이 소설을 쓴 게 소설의 배경과 100년 정도 차이가 나는 1960년대라는 것이시. 사실 이런 유의 소설들, 오래전 과거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의 경우 작가가 최대한 티를 안 내는 게 정상처럼 보인다. 소설 속 시대와 소설을 쓰고 있는 시대의 차이를 말이다. 예로, 김훈의 『남한산성』. 이 소설은 3인칭이고 전지적시점이지만 작가가 마치 병자호란 시대의 기자처럼 사건을 서술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이 역시도 사전 지식이 없으면 이 소설이 도대체 언제 작성된 것인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다. 김영하의 『검은 꽃』도 그렇고,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도 그렇고, 하여튼 거의 모든 소설이 이런 방식을 따른다. 그런데 이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소설은 일부러 작가가 여기 저기 참견하면서 과거와 현대의 이중초점을 가진다. 빅토리아 시대와 오늘(1960년대)의 이상한 비교. 35장은 아예 통째로 여기에 할애되어 있다. 일단 이게 재밌다.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존 파울즈는 소설 곳곳에다 여러 장난질을 하는데, 그 중 하나. 본문에서 노골적으로 소설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설파한다. 이를테면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 내가 창조한 인물들은 내 마음 바깥에 존재한 적이 없다. 내가 이제까지 주인공들의 마음과 깊은 생각까지 아는 척해왔다면, 그것은 내가 이야기의 배경이 된 시대에 보편적으로 용인된 관행 안에서 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라거나 “어쩌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소설가는 줄만 제대로 잡아당기면 된다고. 그러면 꼭두각시들이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할 것이라고. 소설가는 요구에 따라 꼭두각시들의 동기와 의도를 철저히 분석하기만 하면 된다고.……그러나 가능하다고 해서 모든 게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남편들은 가끔 아내들을 살해할 수 있다. 그 반대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고도 무사히 넘겨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라는 식. 심지어 직접 등장인물이 되어 독자 앞에 나타나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게 별로 안 어색하다. 소설의 흐름도 크게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이걸 해설에서는 ‘포스트모던’ 글쓰기라는데, 포스트모던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 ‘포스트’하면서 ‘모던’한 느낌이었다. 말이 안 되나?

***

그리고 이제는 운명의 주사위가 던져졌다는 것을 절감했다. 하나의 간단한 대답이 그렇게 많은 것을 결정지어 준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놀랍게 여겨졌다.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가능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것이 움직일 수 없게 고정되어 버렸다. 

이제 to the core. 이 소설을 읽게 된 가장 큰(사실은 유일했던) 동기였던 것은 김영하의 추천. 영하 형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프랑스 중위의 여자』가 이 소설의 제목인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사라 우드러프. 이 인물이 곧 이 소설인 셈이다. 그녀는 19세기라는 시대가 가지고 있는 관습적 도덕률과 곧 다가올 20세기의 해체적 양상을 동시에 내장하고 있는 인물이며, 따라서 그녀를 통해 소멸해가는 19세기적 도덕률과 다가올 20세기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김영하, 『포스트 잇』
 
물론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책을 덮은 순간 떠오른 것은 찰스, 불쌍한 찰스였다.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입체적인 인물은 찰스다. 사라는 변하지 않는다. 그녀는 갈 길을 간다. 아니 애초에 완성형 인간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 사라는 찰스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지 모른다(사실 모든 인물이 만들어진 것이지만). 세금징수원처럼, 불길한 전보처럼 그녀는 찰스에게 찾아온다. 그 덕에 이름만 들어도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이 찰스란 놈은 소설 내내 번민과 갈등의 부침을 겪는다. 절벽 위에서 바다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는 건 사실 사라가 아니라 찰스다. 그는 사라와의 연애사건을 거치면서 진보에의 확신을 잃고, 자기 신분에 대한 애착도 버리고, 안락한 부르주아 가정에 대한 환상도 부수고 다시 또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에 운명의 주사위가 패배의 쪽으로 던져지듯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지위도, 재산도, 약혼도, 미래도. 그 결과 그는 무엇을 얻었는가. 사라? 글쎄, 소설의 결말을 두 개로 열려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함정처럼 보인다. 존 파울즈가 소설에 직접 등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런 경우 두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더 인상적인 법이다. 그는 사라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고 보는 게 합당한 것 같다). 그럼 사라가 아니라면 무엇을? 설마, 빅토리아 시대를 넘어 현대적 인간으로 탄생되었다는 이야기? 그래, 그 고민과 번뇌, 몸을 절단하는 것 같은 선택으로 새 유형의 인간이 되었다 치자. 그래서 얻은 결론은 이런 것뿐이지 않은가.

한순간, 그 조용한 밤에, 이성과 과학이 녹아 버렸다. 인생은 난해한 기계, 불길한 점성술, 태어났을 때 내려져 항소조차 할 수 없는 판결,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無)였다.

이거 너무 불쌍하지 않나? ‘프랑스 중위의 여자’라는 미래형 인간이 준 선물은 이렇게 뼈아픈 진실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김영하의 말과는 달리 ‘시대를 잘 못 타고난 사람’은 사라가 아니라 찰스이지 않나. 왜 이렇게 찰스의 불행에 잡착하냐면,
나도 그런 것 같으니까. 나도. ‘모든 것을 압도하는 무’를 느끼고 벼랑 위의 포뇨,가 아니라 찰스가 되어버린 심정. 요게 이 소설을 덮자마자 “불쌍타, 찰스”하는 탄식이 터졌던 이유되시겠다. 흑흑.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이 울렸다. 늙었나 보다.  (0) 2012/04/18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2012/02/21 13:26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저자
정성일 지음
출판사
바다출판사 | 2010-08-13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 우리는 그것을 영화라고 ...
가격비교


정성일의 평론집을 읽고 난 후 부끄러운 고백. 나는 아직도 영화를 소설 읽듯이 보는 거 같다. 스토리라인을 중심으로 해서 줄거리에 집착하고, 영화의 표현방식보다 메시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시대적 배경과 감독의 주장, 이야기 구조와 비유, 상징, 설정 등을 통해 좋은 영화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는 말이다. 사실, 이건 소설을 읽을 때랑 큰 차이가 없다. 좋은 영화와 좋은 소설의 차이는 내게 있어 불분명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일까. 나는 ‘카메라로 소설을 쓰는’ 이창동의 영화를 좋아한다. 물론, 이게 꼭 나쁘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건 바람직한 영화보기는 아닌 것 같다. 


영화는 문학이 아니다,라는 정성일의 이야기. 물론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낀 건 얼마 전 <스틸 라이프> 감상. 이건 정말 다른 문학의 표현으로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것을 영화라는 양식으로 토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대충이나마 주워들은 롱테이크와 트래킹, 팬 등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찾아왔다. 어떻게 이걸 한 번에 다 찍었지 하는 생각이 드는 몇몇 씬들. 그리고 그 씬들이 남긴 여운. 영상처럼 축축이 젖어드는 심정. 분명 문자라는 형식이 결코 온전히 전달할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영화에 담겨있었다. 이게 바로 영화구나. 좀 더 나가자면, ‘영화는 문학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영화인의 희망이 느껴지는 심정이었다(물론 나는 영화인도 아니지만). 그리고 난 후 다시 한 번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 마음먹고 영화보기 수련을 해야겠다고 생각, K군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대학원에 진학한 K군이 바쁘다고 ‘다음 기회에’라 하시네. 

돌아보면 내가 ‘최고’라고 했던 영화들은 확실히 영화의 장점(혹은 종특)을 제대로 살린 영화들이었다. 가령 <봄날은 간다>. 은수와 상우가 서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빠져드는 대목. 영화는 한 마디 대사도 없이 겨울 산사에 눈 내리는 소리,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로 그들의 감정을 보는 이에게 전달한다. 요걸 과연 문자라는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비슷하게 <대부 1>의 마지막 장면. 감정의 대립. 문 하나를 두고 나뉘는 세계. 이제는 다른 세계에 속한 마이클. 그를 외부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케이의 시선. 그 시선이 나의 것이 되고 조용히 닫히는 문. 문과 함께 닫히는 영화. 암전. 그리고 내 머릿속도 암전. 찾아오는 떨림. 전율. 요런 건 아무리 잘 쓴 것이라 해도 글로 읽었다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하나 더 <안개 속의 풍경>. 무슨 마조히스트가 된 심정으로 소녀와 소년의 불행, 불운을 지켜보다가, 그야말로 느릿느릿하게 지켜보다가, 마지막 순간, 그 두 남매와 함께 지친 몸과 마음으로 국경을 넘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바로 그 때 안개가 걷히며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 그 때 터지는 듯 찾아오는 압도적 울림을 과연 영화가 아니라면 어느 예술에서 똑같이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러니 내가 이 영화들을 좋아할 수밖에. 

 
한편, 이창동. 내가 무지무지 좋아하는(반대로 정성일은 싫어하는 게 분명한) 이창동 영화들을 두고 생각해보면, 이건 영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아니 영화가 아니라면 더 훌륭하게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전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령 <밀양>. 마찬가지로 <시>. 비슷하게 <초록물고기>. 이 영화들에서 과연 이 것이 영상을 수단으로 했기에 가능한 성과는 무엇이었나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몇 장면 떠오르지 않는다. <시>에서 손자와의 베드민턴씬, <초록물고기>의 자동차유리씬 정도? (생각해보니 <초록물고기>는 빼야겠다. 요건 아니다.) <오아시스>는 위의 것들이랑은 다르다. 다만, 정성일의 말대로 다른 위험성을 가진 영화라 열외. <박하사탕>은, 요건 그냥 내가 별로여서 제외. 하여튼 이창동의 영화는 영화다운 맛은 확실히 없다. 그렇다고 별로냐면, 그건 아니다. 이건 영화라는 형식에 맞고 안 맞고의 범주에서 벗어나 생각해볼 문제다. 이창동의 ‘작품’은 어떠한 소설이나 영화들보다 삶의 근저에서 사람을 울리는 맛이 있다. 확실히 그렇다. 

마무리하며. 정성일의 평론집을 다시 펼친 이유는 왕가위와 <스틸 라이프> 때문이었는데, 보다 보니 다른 이야기들이 더 눈에 들어온다. <장철의 무협영화에 바치는 피끓는 십대 소년의 막무가내 고백담>은 언제 봐도 사람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드는 글이다. 문학/영화계에 대한 비판은 영화란 무엇이고 문학은 무엇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케 한다. (여기서 정성일은 음악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겠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음악의 문외한인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반면에 소설 대신 영화, 마찬가지로 소설 대신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정말 영화에 미친 사람이 미치도록 영화를 파고드는 이야기에 경외감이 든다. 대단하다. 글 어렵게 쓴다고 짜증냈었고, 너무 유식한 척 해서 무식한 나로서는 밥맛이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그런 티내기 마저 존경스러워 보인다.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주시라. 끝으로, 정성일 평론을 보고나면 항상 느끼는 거지만 오즈 야스지로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봐야한다는 의무감 같은 것이 든다. 이번 참에 봐야겠다. 카메라를 생각하면서, 선택을 생각하면서, 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너의 의미  (0) 2012/04/09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0) 2012/02/01
2012/02/19 02:29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원더보이

저자
김연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2-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저마다 상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밤은 노래한다 이후 4년 만에...
가격비교


이건 대놓고 정치적으로 읽으라는 소설이다. 명백히 2012년을 타겟팅한 소설이다. 소설의 마지막만 봐도 그렇다. 


그리고 1978년 여름이 되자
(여기서 1978년은 1987년의 오타다. 썅, 편집자는 뭐한거야, 이런 중요한 대목에서 오타를 내다니.)
베드로의 집에서 국영수를 가르치던 형들이 우리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완전히 다를 거라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촌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노골적이다. 뿐만 아니다. 단순 교통사고가 간첩을 잡은 영웅적 행위로 둔갑하는 소설 시작에서부터 주인공 소년의 초능력이 사용되는 곳이 대공분실이 되고, 소년을 도와주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데모꾼들이며, 그토록 찾고 싶었던 어머니는 월북가정의 아픔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 등등 이 <원더보이>란 소설은 정치적으로 해석하게 밖에 없는 장면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게 단순히 소설의 시대적 배경인 80년대 군부독재시기에 대한 설명을 넘어 정치적인 이유는 소설이 구체적으로 다루는 하나하나의 정치사회문제들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2012년 오늘 우리사회를 떠올리게 해서겠지. 가령 소설에 나오는 동아일보 언론자유화운동(이건 엄밀히 70년대일이지만)은 mb정부 들어 심각하게 진행된 언론장악, 구체적으로 YTN사태와 최근 MBC 파업을 떠올리게 한다. 철거반원들과 공권력에 의해 무너져 내리는 동네는 2009년 겨울, 용산 남일당에 다름 아니다. 소설 속 ‘침묵까지 포한한 25행의 시’ 중 ‘금강산댐이 터지면 국회의사당이 완전히 잠긴다는 뉴스’, ‘우리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라고 말한 국회의원이 체포될 때’, ‘건국대학교에서 농성을 벌이던 대학생 1289명이 구속될 때’ 등 1986년의 사건들이 결코 옛날의 일로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2012년 오늘이 실상은 그 과거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야만의 시대라는 사실 때문이며, 독자로 하여금 그렇게 느끼고 함께 분노하자고 하는 것이야말로 작가 김연수가 이 소설을 쓰며 노린 것일 테다. 그렇게 이 정치적 소설 <원더보이>는 읽을 수 있는데,

문제는 나머지 부분들. 소설은 이렇게 정치적 사건들 말고도 주인공의 초능력, 신비한 빛, 미스테리한 엄마의 존재 등 이것저것 굵직굵직한 것들을 건드리는 듯 한데, 주인공의 초능력 중 다른 사람을 공감하게 하는 능력의 경우 그게 이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동력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정치적 테두리 내에서 해석할 수 있다 쳐도 나머지 부분들은 솔직히, 이게 뭔가 싶다. 소설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별에 관한 이야기는 맥락에 안 맞게 너무 붕 뜬 느낌이다. 내용은 알겠다. 어찌됐건 이 <원더보이>는 성장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으니까. 근데 그 별과 우주와 나와 존재가치에 대한 부분들이 이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무공아저씨 에피소드와 이만기와 쌍둥이 이야기, 희선의 애인 이수형에 대한 부분도, 이수형의 경우 뭐 정치적으로 읽을 수 있겠지만, 소설을 양적으로 풍부하게 한 면 말고 뭔가 더 대단한 것을 이루는 데 쓰인 것 같지는 않다. 쉽게 말해, 하나의 장편소설이 아니라 여러 단편들의 집합 같았다고나 할까. 어쨌든 김연수의 전작들이 비교적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 책을 덮을 때면 뭔가 가슴속에 묵직한 것이 들어앉는 반면 이 <원더보이>는 어색한 퍼즐을 억지로 끼워 맞춘 탓에 소설을 끝까지 다 읽은 후에도 뭔가 허전함이 남아있는 느낌이다.
내가 이 소설의 진가를 제대로 못 본걸까. 뭐, 그래도 어쩔 수 없고. 어쨌든 마무리는 연수 형의 바람대로 다시 한 번 '우리의 다짐'.

만약 누군가 그런 짓을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뭐라도 할 것이라고.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린 혼자가 아니라고.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림자를 판 사나이  (0) 2012/04/04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0) 2012/02/01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의 결과일지도  (0) 2012/01/15
2012/02/14 22:24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저자
천양희 지음
출판사
창비 | 2011-01-1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진솔한 시어와 ...
가격비교


그자는 시인이다

그는 일생을 쓰면서 탕진했다 탕진도 힘이었다
그 힘으로 피의 문장을 썼다

불꽃 삼키고도 매운 연기 내는
굴뚝의 문장
시뻘건 꽃 피우다 모가지째 툭, 떨어지는
동백의 문장
모천회기하려다 불귀의 객이 되는
연어의 문장

문장을 들고
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
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
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
슬픔은 말하자면 비자금 같은 것인데
슬픔을 저축해둘 걸 그랬어 아이들 듣는데
그런 소리 마라 아이가 자라면 죄도 자라는 것이니
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

도대체 이놈의 문장은 구속을 담배에 불붙이듯 한다
담배에 불붙이며 중얼거린다

죄를 병처럼 끙끙 앓는 그의 몸은 세찬 바람이다
바람소리에는 운명이 들어 있다 아니 미래의 미지가 들어 있다

어떻든 간에 그자는 시인이다 


시집을 오랜만에 읽었다. 
좋은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라는 존재가 한없이 경배하게 되는 반면 가뜩이나 미천한 나라는 존재는 너무너무너무 초라해져서 어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 이 사람들이 나랑 같은 세계에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느끼고, 같은 말을 쓰면서 같이 살고 있나? 그게 잘, 믿겨지지 않는다.
이 시에서 왠지 모르게 2연이 맘으로 들어왔다. “문장을 들고/두려움과 슬픔을 이기기 위해/쓰고 쓰고 또 쓰는 지독한 짓/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말은 뿔처럼 단단해지고/불안은 소리처럼 멀리 퍼진다” 특히 문장이란 낭비의 극점에서 완성되는가, 요 문장이. 
요 다음 연의 첫 행 “뒤져보면 두려움이 슬픔보다 더 두꺼웠다”“피붙이란 본질적으로 슬픈 것이지”도 가슴을 무겁게 두르렸다. 이유를 억지로 찾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그랬다.

어처구니가 산다

나 먹자고 쌀을 씻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꽃 다 지니까
세상의 삼고(三苦)가
그야말로 시들시들합니다

나 살자고 못할 짓 했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잘못 다 뉘우치니까
세상의 삼독(三毒)이
그야말로 욱신욱신합니다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겨우 봄이 간다는 걸 알겠습니다
욕심 다 버리니까
세상의 삼충(三蟲)이
그야말로 우글우글합니다

오늘밤
전갈자리별 하늘에
여름이 왔음을 알립니다



사라진 계절

사자별자리 자취를 감추자 봄이 갔다
꽃이 피었다고 웃을 수만은 없는 그런 날이었다
문을 닫는 순간 내 안의 무엇인가 쾅, 하고 닫혔다
고통이란 자기를 둘러싼 이해의 껍질이 깨지는 것이었다

전갈자리별 자취를 감추자 여름이 갔다
초록 나무에도 그늘이 짙은 그런 날이었다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
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노랑발도요새가 자취를 감추자 가을이 갔다
고독이 지쳐 뼈아프게 단풍 드는 그런 날이었다
잃다와 잊다가 같은 말이란 걸 아는 순간 내 속에 피가 졌다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것이 내가 살아남은 유일한 이유였다

흰꼬리딱새가 자취를 감추자 겨울이 갔다
몸이 있어서 충운 그런 날이었다
안다고 끝나는 게 세상일이 아니란 걸 깨닫는 순간
내 안의 어둠이 쏟아졌다
이 세상 와서 내가 없는 계절은 없을 것이다



요 두 시를 읽으며, 내 인생의 봄을 생각한다. 봄은 다 져 버렸다. 어영부영 하다보니, “우두커니 서 있다”보니 어느새, 봄이 다 가버렸다. 아마, 여름도 그렇게 지나가겠지. “종이 위에 생각을 올려놓는 순간 말할 수 없어 나는 침묵을 썼다/외로움은 내 존재가 피할 수 없이 품은 그늘이었다” 와 닿는다. 가라앉는다. 침전한다. 앙금이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제는 남는 씁쓸함  (0) 2012/03/11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0) 2012/02/01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의 결과일지도  (0) 2012/01/15
복수할꺼야 개새끼들아  (0) 2012/01/11
2012/02/13 13:01

what, how, when, where



아랑은 왜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2-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유쾌한 이야기꾼 김영하의 장편소설! 지금 세대를 대표하는 소설...
가격비교


읽을 만한 게 하도 없어서 다시 읽었다. 예전에 읽었을 땐 “참신한 맛은 있지만 재미는 없는 소설이네” 했는데, 웬걸, 다시 보니 김영하가 이걸로 유명세를 탄 이유를 알겠다. 그래서 다시 정리: 김영하의 장편소설 중 내용면에서는 『검은 꽃』이, 재미면에서는 『퀴즈쇼』가 최고라면, 형식면이라고 할까, 뭐 말은 안되는 표현이지만 문학적인 면에서는 『아랑의 왜』가 제일 낫다.

What보다는 How
예전에는 분명히 이야기 자체에 끌렸다.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 그 이야기는 어떤 소재를 다루었고, 어떤 당파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결말을 이야기하는가. 마찬가지로 여기서 이야기는 레알리티가 있느냐, 왜 하필 지금 이 이야기를 해야 했는가 등등.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걸로 가치를 매겼다.
지금 생각해보니, 확실히 어렸던 것 같다. 어려서 제대로 된 맛을 몰랐다. 고기부페에 가서 아이스크림만 먹는 아기들처럼 말이다. 지적수준과 경험이 일천하여 그냥 이해하는데 급급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다. What도 중요하지만 How도 중요하다, 아니 소설과 영화와 같은 작품들에서 quality를 결정하는 것은 확실히 What보다도 How다. 아무리 좋은 소재와 내용도 형식이 유치하고 촌스러우면 허섭스레기가 되고 만다.

『아랑은 왜』는 바로 이 How에 관한 소설이다. 
이야기는 있다. 어떻게 풀 것인가. 
요걸로 설명문이 아닌 소설을 한편을 써냈다. 아, 참신하도다. 
여기에 대해 길게 글을 쓰려했는데 잘 정리된 글이 있어서 링크(링크)

What, How 만큼이나 When과 Where
무슨 이야기가 어떻게 써져 있느냐 만큼 중요한 게 바로 언제 이걸 어디서 읽었냐 하는 거다. 김영하가 『랄랄라 하우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내 이름은 빨강』을 서울 대학로에서 읽는가와 터키 이스탄불에서 읽는가는 천지차이다. 비슷하게, 내가 스무살 대학입학 직후에 『상실의 시대』를 읽고 느끼는 감정과 서른살에 읽으면서 느끼는 애잔함의 깊이는 당연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고. 따라서 어느 시점에 어떤 환경(공간적 의미를 넘어서)에서 책을 읽는냐 하는 것은 독서의 결과에 굉장히 중요하다. 이번에 『아랑은 왜』를 읽으면서 동시에 <인셉션>을 보았고, <불신지옥>을 봤더니 자연스럽게 이 세 개가 믹스가 되면서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예컨대 <불신지옥>: 이렇게 좋은 소재로 요로코롬 밖에 못 만드나, 하는 생각 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요즘에 책을 읽으면서 현실을 초월하는 이야기만 하는 것도 사실 이 When/Where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나 싶다. 뭐랄까, 지금은 뭘 읽어도 그냥 평가하고만 싶지 이걸 통해 내 발전의 계기로 삼자, 더 노력해야한다 하는 자기발전적 결과를 얻기 힘든 상황이다. 내 마음/상황이 그렇다. 물론 자기발전은 사후 추적으로만 평가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런 시기다. 깊은 독서가 불가능한 시기. 슬프다. 병신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다리던 거랑 다른 게 왔다  (1) 2012/03/06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0) 2012/02/01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의 결과일지도  (0) 2012/01/15
복수할꺼야 개새끼들아  (0) 2012/01/11
어쩌면 모든 게 우연!  (0) 2011/11/19
2012/02/03 21:34

위기의 증거


백의그림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지은이 황정은 (민음사, 2010년)
상세보기


얼마 전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 질문 글을 하나 올렸다. 최근 들어 한국소설의 수준이 세계소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여기저기서 비판이 많은데 정말 그런지, 그렇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지 하는 내용이었다. 몇 개의 답글이 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읽을만한 장편들이 없죠. 장편에서 수준차가 가장 클듯. 그리고 인재가 안몰리는 것도 한몫할듯 싶네요. 영화만 해도 엘리트들이 유입되는 시기가 있었으나 문학은 아니었죠. 지금도 상타는 애들 보면 거의 문창과 출신들.  


단편 집중적인 기형적인 구조. 주례사 비평이라 불리는 칭찬 일색의 비평들.
그로 인해 장편은 구성 및 형식이 안습 수준. 문체 중심의 사소설 경향이 득세. 뭐 총체적 난국이었으나 요즈음 그나마 많이 해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상문학상단편집은 나오는 작가가 거의 정해져있죠. 안보고도 예상가능;; 장편 신인 뽑는 문학상 수상작보면 처참한 수준..; 뽑는 심사위원 수준까지 의심하게 만드는데 얼마나 없었으면 싶을 정도인 것도 있더군요. 태생 한국인도 공감못하는데 번역되서 팔려나가는건 언감생심..


생각해보니,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말고 와, 하는 감탄사로 기억되는 장편소설이 없다. 단편소설 중에는 뭐 가끔씩 괜찮다 싶은 걸 발견하지만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랫동안 기억날 정도로 무게감 있었던 건 몇 개 없었던 것 같다. 김영하가 편해영의 『통조림 공장』을 읽고 남긴 비판―링크. 맞는 말처럼 보인다. 위기는 위기다.

어제하고 오늘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를 읽었다. 책 뒤편의 작품해설에는 “사려 깊은 상징들과 잊을 수 없는 문장들이 만들어 낸, 일곱 개의 절(節)로 된 장시(長時)”, “윤리적인 사랑의 서사”라고 되어 있지만, 내가 보는 눈이 형편없어서 그런가, 이게 바로 ‘주례사 비평’인 거 같다. ‘구성 및 형식이 안습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히 어설프고, ‘문체 중심의 사소설 경향’이라는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폭력이 폭력답게 거칠게 몰아붙이는 세상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따뜻하고 의연한 사랑. 희망까지는 안 되도 위로는 될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의 사랑이야기―주제는 뭐 그렇다지만 그걸 이야기로 풀어내는 힘이 확실히 부족해 보인다. 일단 눈을 오래 잡아놓지 못한다. 그렇다고 참신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앞으로 한국소설을 고를 때는 서점에서 대충이나마 읽어보고 골라야겠다,는 생각을 먹게 해준 독서였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쌍타, 찰스  (0) 2012/02/29
영화를 영화답게 읽기 위해서  (0) 2012/02/21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0) 2012/02/01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의 결과일지도  (0) 2012/01/15
복수할꺼야 개새끼들아  (0) 2012/01/11
어쩌면 모든 게 우연!  (0) 2011/11/19
거대한 파도 앞에서  (0) 2011/11/19
2012/02/01 13:11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옥수수와 나(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2012년)

저자
김영하 지음
출판사
문학사상 | 2012-01-1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현대 소설의 흐름을 보여주는 이상문학상 작품집!2012년 제36...
가격비교


대학교 1학년 때 D와 같이 <소설의 이해>란 강의를 같이 수강한 적이 있다. 교수가 선정한 소설을 수강생들이 읽고 그 소감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수업이었다. 벌써 10년도 더 된 이야기니 어떤 소설을 어떻게 읽었는지 다 기억하지 못 하지만 염상섭의 『만세전』과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확실히 이 수업을 통해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정말 부리나케 다시 돌아가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Shift+Delete 키를 누르고 싶은 망신스런 일 때문에 아직도 강렬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다. 

 
박태원의 이 소설을 읽고 각자 느낀 소감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나는 발표자로 지목됐다. 물론 지금도 형편없지만, 문학작품을 읽으며 그 속의 담긴 참뜻을 파악하는 일에 지금보다도 훨씬 서툴렀던 당시의 나는, 전년에 본 수능 언어영역에서 110점 이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만큼 ‘언어’영역이 부족했다. 책을 다 읽은 후에도 해설을 보지 않으면 이게 왜 좋은 작품인지 모르는 경우가 일이 많았으니까.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도 마찬가지. 읽기는 쉽고 빠르게 읽었는데 이게 도통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범인처럼 지목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와 쿵쾅쿵쾅 요동치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입을 떼는데, 아―,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정도로 창피한 말들을 막무가내로 뱉어냈다. 뭐 그리 허세부리고 싶었는지, 개인과 세계가 어떻고, 카프카(먼 이국땅에서 고생이 많으셨다)가 어떻고, 존재가 어떻고, 실존주의가 어떻고. 한 3분 정도였나, 옆자리의 D가 창피할 만큼 횡설수설, 뚱딴지같은 발표를 마친 후 땀이 가득한 손을 말아 쥐고 자리에 앉는데 정말,
쪽팔렸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문제는 Next. 내 자다가 하이킥 쇼가 끝난 후 다음 발표자로 지목된 사람이 단상 앞으로 나갔다. 자연대 98학번인가, 왜소한 체격에 무슨 피부병을 앓고 있어서인지 얼굴 여기저기에 각질이 붙어 있는, 하여튼 후줄근한 외모였던 걸로 기억한다. 꽤나 쑥스러움을 타면서도 그는 천천히, 하지만 똑똑히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가 보기에 이 소설은 소설가가 자기 신분에 대해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고 말이다. ‘소설가는 왜 글을 쓰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거창한 그 무엇을 위해서인가.’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의 주제라고, 그는 말했다. 발표가 끝나고 교수는 이 형의 발표를 토대로 소설의 의미를 해설해줬다. 직업이 되어버린 작가. 그러나 작가는 직업으로 볼 수 있는가. 소설가는 무엇을, 왜 창조(해야만)하는가 등. 형의 발표와 교수의 설명을 듣고서야 나는 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란 작품이 무척 세련된 소설이며 한 작가의 대단한 고뇌의 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숨고 싶어졌다, 구멍 찾는 쥐처럼.

*          *          *

김영하의 『옥수수와 나』를 읽으면서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이 생각났다.

*          *          *

다 읽고 나서야 엉, 내가 지금 뭘 읽은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에피파니의 상태로 영적인 엑스터시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글을 썼다면 나는 마찬가지의 심정으로 요걸 읽었다. 정말 빠져들었다. 이런 소설, 특히나 김영하의 단편소설은 이게 단점이다. 결국 다시 봐야 한다. 그래서 복기.

주인공 ‘나’는 소설을 쓰려한다. 쓰기 싫지만 써야한다. 왜? 처음에는 돈 때문에. 나중에는 질투 때문에. 마지막에는 그냥 ‘빙의’ 돼서. 그에게 소설을 쓰게 만드는 주체는 다양하다. 질투를 유발하는 전부인, 미국유학을 꿈꾸는 딸, 골드만삭스 출신의 사장, 거기다 철학교수 시인 친구까지. 사실 창작가가 아닌 평민의 시각에서 보면 소설을 쓰는 데 있어 무엇을 쓸 것인가―이른바 주제―가 우선이고,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동기라 생각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어쩌면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라는 존재란 그저 고객(또는 고용주)의 요청에 글로 이루어진 상품을 제공함으로써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작가는, ‘문학계의 해병대, 육체노동자, 정육점 주인’이라는 소설가는 어떤 존재일까, 이런 의문 하나.
어쨌든 그는 여러 push에 맞춰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쓸게 없으니 말이다. 여기서 미라클. 정말 기적처럼 뉴욕의 사장의 집에서 그의 아름다운 아내와 섹스를 나눈 후에야 그는 미친 듯이 글을 쓸 수 있었다. “이게 말이 될까, 이런 걸 써도 될까, 같은 자기 검열이 작동하지 않으니 서사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혹시 사장과 전부인이 상징하는 어떤 것―그건 자기를 이 뉴욕 땅에서 글을 쓰게 만든 힘, 현대자본주의 사회가 평범한 모든 인간들을 아침 9시까지 회사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그 force로부터 일탈한 후에야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 수 있었다는 사실 아닐까, 이런 의문 둘.
어쨌든 주인공이 만들어 낸 건 줄거리도 없는 난잡한 소설. 하지만 사장은 골드만삭스의 핵심답게 아주 잘 짜인 플롯으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아간다. 죽음의 직전에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닭과 옥수수’ 농담에 나오는 정신병자와 닮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는 사장과 바람피우지 않았다. 철학교수 친구 놈은 개후레자식이었다. 지금까지 자기를 몰아세운 건 ‘닭’ 이 아니라 자기 자신 ‘옥수수’였다. 청산가리, 어쩌면 수면제를 먹고 난 마지막 순간에야 주인공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고 ‘읽는다.’ 지젝이 말한 농담에서 정신병자는 자신이 옥수수가 아니라는 것을 납득하였지만 닭들은 그걸 모르기에 두려움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냥 조크라 여길 수도 있지만 진지하게, 이 환자는 어떻게 완치될 수 있을까. 그가 옥수수가 아닌 사실보다 더 중요하게 외부의 시각에서 그가 옥수수가 아니라고 확증 지어줄 어떤 것이 필요하다. 여기에 작가를 대입; 순수한 의미로서의 작가 ‘나’와 자본주의세계에서 작가 ‘옥수수’, 그리고 그 옥수수를 털어먹는(강제하는) 외부 ‘닭’. 좀 오버스럽지만 이렇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 셋.
 
이런 의문들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주제와 이어진다. 작가란 무엇인가, 왜 소설을 쓰려 하는가, 이 사회에서 작가는 어떤 기능을 해야 하는가. 김영하가 작년 초에 소조와 벌인 논쟁을 떠올리면, 그리고 작품집 안에 있는 자전소설과 수상소감까지 읽어보면 김영하가 생각하는 소설가는 어떤 사람인지 대충 그려진다. 읽히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쓰는 것 자체가 중요한 사람. 세상에 인정받는 것보다 자기 안의 괴물을 어떻게든 꺼내놓고자 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떠오르는데……프란츠 카프카? 그래서 가지게 되는 생각. 혹시 소설 속에서 ‘섹스를 한다’는 관념을 버리기 위해 철학교수가 바람을 핀다면 소설가는 ‘OO을 한다’는 관념을 버리기 위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OO을 한다’라는 것이 ‘존재를 자각하기 위해’라고 생각하는 건 과한 것일까.

덧붙여서,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옥수수가 되기는 쉬울터. 나도 필요한가, "나는 옥수수가 아니다"라는 주문이. 그런데, 세상이 요지경이라 아무리 주문을 외더라도 효과가 없다. 그게 이 단편소설을더 서글프게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2012/01/15 03:27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의 결과일지도



7년의 밤

저자
정유정 지음
출판사
은행나무 | 2011-04-0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딸의 복수를 꿈꾸는 한 남자와 아들의 목숨을 지켜려는 한 남자!...
가격비교



운명이 난데없이 변화구를 던진 밤,
당신이라면 저주받은 생을 어떤 타구로 받아칠 것인가

항상, 정말 하앙상 현재의 결과를 되돌릴 수 있는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갈망하는데
어느날 잠시잠깐, 
어쩌면 지금 여기서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게 나란 놈이 얻을 수 있었던 최고의 결과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만도 하다. 나란 놈에 대한 기대는 스스로 버린 지 오래. 말도 안되는 확률의 기적에 미래를 걸고 있는게 지금 나의 현실인데 뭐. 그래도,
뭔가 달라져야 한다, 고
이제는 생각한다. 결심이 필요하다. 라이프스타일이란 걸 한동안 고민했듯이. 뭔가, 대단한, 결심이.

*          *          *

주중에 술을 한 잔 했다. 조금은 설레는 술자리였는데, 특별한 어떤 걸 기대한 건 아니지만 후회가 많이 남는다. 다들 잘 살더구만. 그게 약오른 건 아닌데, 어쨌든 억지로 다시 만나고는 싶지 않다. 그들 앞에서는 어쨌든 연기를 해야하니까. 멋진 척도 멋지지 않은 척도 아니고, 뭐랄까, a를 연기해야 하는 A인데 정작 나는 b인 상태라고나 할까. 굳이 억지로 그런 상황에 처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보다 직접적 타격으로 두 번을 토하고 회사에서 약먹은 닭마냥 하루종일 앓다가 토요일 12시간을 통째로 날려버렸으니 이건 분명 마이너스 게임이다. 이제 잘 생각하고 처신해야겠다. 그러고보니 첫 번째 결심이 필요하다. 
침착해야 한다. 대범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항상 신중하게 처신해야 한다. 그게 지금의 나를 지키는 길이다. 침착. 신중. 이걸 명심. 그리고,
억울해할 필요없다. 상기하라. 현재의 내 모습이 어쩌면 내가 얻을 수 있었던 최선의 결과였다는 사실을. 앞으로가 중요하다. 앞으로가.
 
*         *          *

정유정의 『7년의 밤』을 읽었다. 책을 사기 전에 가졌던 기대보다는 훨씬 재밌게, 읽는 도중 느꼈던 흥분보다는 허탈하게. 역시 정유정이다. 재밌게 빨아들이지만 오래 잡아두지는 않는다. 그게 다행인지도. 현실이 아닌 소설에 너무 오래 발목잡힐 필요는 없지 않나. 재밌게 읽었으면 땡이지 뭐. 어쨌든, 오랫동안 ‘읽는다’는 행위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있었는데 이 소설 덕에 다시 책의 소굴로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그건 고맙다.

근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주인공 소년이 너무 불쌍하다. 결국 고생고생해서 알게된 사건의 진상은 아버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마을사람들을 죽게끔 만든 거잖아. 그러면,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아버지가 그냥 미친놈, 살인마여서 사람들을 다 죽인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자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었다? 와, 대단한 부정. 아빠 고마워요. 이해할 수 있어요. 그래서 갈등소멸, so happyending?
아무리 큰 죄를 범했다 하더라도 싸이코의 자식에겐 이런 변명이 가능하다. "얘가 무슨 잘못이 있냐. 미친 악마놈을 아빠로 둔 거 말고. 알고보면 얘도 불쌍한 애다." 근데 사건의 실상이 밝혀지고 나면 이런 변명이 불가능하다. 분명히 주인공 소년은 여러 사람의 주검의 결과로 존재하는 셈이니까.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자신은 여러 희생양의 죽음으로 살 수 있었으니까. 그의 존재 자체가 죄악의 목적이며 결과였으니까.
1)싸이코의 아들과 2)죄의 목적 혹은 결과물. 과연 어떤 게 더 나을까. 나는, 
후자가 낫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골적이다, 노골적이야  (0) 2012/02/19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  (0) 2012/02/14
what, how, when, where  (0) 2012/02/13
위기의 증거  (0) 2012/02/03
김영하, 구보 씨, 그리고 카프카?  (0) 2012/02/01
어쩌면 지금 이 모습이 최선의 결과일지도  (0) 2012/01/15
복수할꺼야 개새끼들아  (0) 2012/01/11
어쩌면 모든 게 우연!  (0) 2011/11/19
거대한 파도 앞에서  (0) 2011/11/19
다시 봤다, 애덤 스미스!  (0) 2011/11/19
『불안』, 알랭 드 보통  (0) 2011/11/19
TOTAL 2,990 TODAY 16